산소호흡기를 착용할 정도로 호흡이 어려운 상태에서 한 '구수증서(타인이 구술한 내용을 글로 작성한 증서) 유언' 역시 효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해 구수증서 유언의 효력을 보다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 민사2부(주심 대법관 오경미)는 A씨가 "예금을 반환해 달라"며 우리은행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유언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환송했다고 4일 밝혔다. 원심이 유언의 효력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인 B씨는 2021년 4월23일 병실에서 변호사인 증인과 수증자인 A씨가 입회한 가운데 '자신의 전 재산을 A씨에게 증여한다'는 취지의 유언을 남겼다. 당시 A씨는 유언을 받아 적어 대신 낭독했고, 변호사가 이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했다.
녹화 영상 속 B씨는 산소호흡기 등 의료기기를 착용한 채 예금 채권 계좌번호 등을 어눌한 발음으로 힘겹게 말했다. 신체 상태가 유언의 전체 취지를 말하긴 어려웠던 상태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재산 내역에 대해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기억을 보완해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B씨는 유언 후 사흘 뒤 숨졌다.
A씨는 유언일로부터 7일 뒤 서울가정법원에 유언 검인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A씨가 청구한 예금 채권 9600여만원에 대한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A씨는 2022년 8월 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은 모두 구수증서 유언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B씨가 재산 상태와 유증의 의미 등을 인지하고 의사 표현이 가능했던 만큼 녹음을 통해 유언이 가능했다고 본 것이다. 또 영상 속에선 유언의 연월일이나 증인의 성명·정확성 등이 녹음되지 않아 효력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쟁점은 B씨가 유언을 남길 당시 녹음이 가능했는지 여부다. 원래 유언은 자필·녹음·공정증서 등의 방식으로 남겨야 한다. 다만 민법은 질병 등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구수증서 유언을 허락한다. 1·2심은 B씨가 일부 계좌번호를 언급할 수 있는 만큼 녹음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고 봐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의 보충성'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반면 대법원은 "건강 상태에 비춰 스스로 유언의 전체 취지를 육성으로 녹음해 녹음에 의한 유언을 할 수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해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원심으로서는 위와 같은 사정들까지 면밀히 살펴보거나 심리해본 다음 이 사건 유언장이 구수증서에 의한 유언으로서 요건을 갖췄는지 여부를 판단했어야 한다"며 "그런데도 원심은 판시와 같은 사정만으로 유언장이 구수증서 유언 요건을 갖추지 못해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말았으니 구수증서의 보충성 내지 유언의 효력에 관한 법리 등을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