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15년이 지났다. 규모면에서 큰 성장을 했지만 연금 수익률 등 질적 성장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올해 퇴직연금은 질적 성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에서 적립금운용계획서(IPS)가 의무화되고 확정기여형(DC)에서는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도입되기 때문이다.
DB의 제도 변화는 상대적으로 근로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적지만 운용과정을 잘 정립함으로써 기업의 퇴직연금 수익성을 개선할 뿐 아니라 자본시장에 주는 플러스 효과도 크다. 지금까지 DB는 기업이 알아서 적립금을 운용하다 보니 원리금보장상품에 집중돼 기업의 수익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퇴직 적립금도 100%에 미달하는 기업이 많아 근로자의 연금 수급권 문제가 있었다.
이에 당국은 올해 4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해서 적립금운용위원회와 적립금운용계획서를 의무화했다. 또 최소적립금 비중을 90%에서 100% 수준으로 상향하고 이에 미달할 경우 과태료 부과 등 강제력을 행사하기로 했다. DB는 대기업들이 주로 채택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조치는 DB 시장 전반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DC에서는 디폴트옵션이 7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디폴트옵션은 DC형 가입 근로자가 상품 운용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지정된 상품으로 운용되는 제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과 달리 투자 손실에 대한 면책 조항이 없어 적격 상품 중에서 근로자가 사전에 지정해야 한다. 근로자가 지정할 상품은 고용노동부의 심의를 거치고 고용노동부 장관 승인을 통해 안정성 등이 평가된 적격 디폴트 상품 중에서 사용자와 근로자가 합의한 상품에 한정된다.
핵심은 디폴트옵션에 포함되는 상품이다. TDF(Target Date Fund, 생애주기형 펀드)가 대표적이며 이 외에 혼합형펀드, 부동산인프라펀드, 예금과 GIC(이율보증형 상품)와 같은 원리금보장상품이 있다. 디폴트옵션 상품에서 원리금보장상품은 애초에 제외하기로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사전에 상품을 근로자가 지정하는 것, 원리금보장상품이 적격 상품에 포함된 것은 투자 손실에 대한 면책 조항이 없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탄생한 '한국적 디폴트옵션'이라 할 수 있다.
DB·DC의 숙원이었던 제도 개선이 올해 이루어진다. 퇴직연금의 질적 성장을 위한 환경은 조성한 셈이다. 하지만, 적격 디폴트 상품에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되면서 자칫하면 일본처럼 디폴트옵션 제도 채택에도 불구하고 근로자가 여전히 예금을 선택할 수 있다. 원리금보장상품은 근로자가 단기적으로 마음이 편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낮은 수익으로 노후가 불편하게 된다.
국가는 단기적 결과를 선호하는 개인의 심리적 편향을 보정하는 제도를 만들어야지 모두 개인의 선택에 맡기겠다는 것은 맞지 않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고 이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운영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더불어, 기금형 퇴직연금 등 집합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면 이런 단점을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