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엔 돈 넘치는데 기업은 팍팍…회사채·유증까지 막힌 '돈맥경화'

김세관 기자, 김경렬 기자, 성시호 기자, 박종진 기자
2026.08.11 06:30

[MT리포트]돈맥경화, 기업들 곡소리 난다(上)

[편집자주] 최근 상장사들의 자금 조달이 전방위로 어려워지고 있다. 회사채·메자닌 등 다른 자금 조달 창구부터 위축된 데다, 마지막 보루였던 유상증자마저 잇단 정정요구로 발이 묶이는 형국이다. 금융당국의 자금 조달 정책 방향마저 예년보다 깐깐해져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진다. 돈의 흐름이 시장 말단까지 유연하게 흐르게 할 수 있는 해법을 모색해 본다.

돈은 넘치는데 조달 문턱은 깐깐…마지막 보루 유증마저 '고구마'

반기별 회사채 발행 및 기간말 국고채 금리 추이/그래픽=임종철

한국은행이 지난달 공개한 지난 5월 광의통화(M2) 평잔은 4184조원으로 전월대비 32조원가량 늘었다. 지난해 11월 이후 7개월째 증가세다. 시중 유동성이 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원통화(M0) 대비 M2의 비율을 나타내는 통화승수는 2024년 연평균 14.9배에서 지난 5월 13.36배까지 낮아졌다. 돈의 흐름은 늘었지만 실물경제에 미치는 효과가 그만큼 크지 않은 현 상황을 방증한다. 실제로 상장사를 포함한 기업들은 자금 경색을 호소한다. 최후의 보루인 유상증자 활용도 금융당국의 문턱이 더 깐깐해진 상황이어서 기업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진다.

지난 5일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8일 이사회를 열고 1367억원 규모의 주주배정 방식 유상증자를 결정한 SK디앤디의 증권신고서 정정을 요구했다. 지난달 31일에는 한울반도체, 엣지파운드리, 상지건설 등 코스닥 상장사 3곳의 유상증자 관련 증권신고서 제출이 한번에 요청됐다.

2조4000억원 규모의 유증을 시도했던 한화솔루션은 올해 4월 두 차례의 정정요구 이후 그 규모를 1조7000억원 수준으로 줄였다. 1조2000억원 규모의 신규 투자 활용 목적 증자를 신청한 에코프로비엠도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를 받고 자금 조달에 제동이 걸렸다.

올해 들어 금융당국 개입으로 유상증자 계획이 밀리거나 그 규모를 축소한 사례는 15건에 달한다. 올해뿐 아니라 지난해에도 삼성SDI가 여러 차례의 정정 신고 끝에 겨우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실상 허가제를 연상케 하는 금융당국의 허들 높이기에 최근 유증 규모 역시 감소하는 추세다. 한국예탁결제원이 지난달 말 배포한 자료를 보면 올해 상반기 유증 발행 금액 규모는 6조2722억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8조3103억원과 비교해 24.5%가 감소했다. 지난해 하반기 유증 금액 17조5800억원 대비로는 무려 3분의 1이 준 셈이다.

자본시장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유증은 과거 문제가 됐던 경영자나 대주주 위주 유증과 달리 증자 목적과 주주가치 제고 등이 명확하게 명시된 경우가 많다"며 "기업과 투자자의 자율에 맡겨져야 할 자본 조달이 과도하게 통제되는 흐름으로 정책 방향이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턱이 높아진 상황에도 기업들이 유증을 자금 조달 방식으로 선택하는 건 꽉 막힌 발행시장 때문이다. 기업들이 선호하는 자금 조달 방식(은행 대출 제외)은 '회사채→메자닌(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유증' 순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회사채 발행액은 123조5968억원. 전년동기대비 15.2% 감소했다. 일반회사채는 25조9052억원으로 31.5%, 금융채는 90조4157억원으로 7.2%, 자산유동화증권(ABS)은 7조2759억원으로 30.6% 각각 줄었다.

회사채 발행이 줄어든 이유는 △시장금리 상승 △전자단기사채(전단채) 투심 위축 △금융당국의 메자닌 압박 △레버리지 ETF(상장지수펀드)의 시장교란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 3월 AA-급 3년 만기 회사채 금리는 미국·이란의 전쟁으로 국제유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우려가 겹치면서 하루 만에 0.132%포인트(P) 오르기도 했다.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작년 말 연 2.953%에서 7월 말 3.959%, 같은 기간 AA- 3년물 회사채 금리는 연 3.476%에서 4.653% 등으로 각각 상승했다.

전단채 투심도 얼어붙었다. 1년 미만으로 만기가 짧은 전단채는 높은 수익률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투기등급 바로 위(투자적격 최하위) 단계의 신용등급을 갖고 있어서다. 자산운용사는 이런 상품을 하이일드펀드에 기초자산으로 담아 수익률을 높인다. 하지만 올해 제이알글로벌리츠와 JTBC 등 전단채 디폴트 사태가 발생하면서 불안전한 채권을 찾는 회사가 줄었다.

메자닌 시장도 잠잠해졌다. 3차 상법 개정에 따라 기업들이 자사주 소각을 피하려는 '꼼수'로 EB(교환사채)를 활용하고 있다는 논란에 당국이 압박을 가하면서 시장은 멈춰 섰다. 지난해 말 광동제약의 EB 발행 철회가 대표적이다. 금감원은 아이톡시의 CB(전환사채)에 대해 전환가액 리픽싱 규정 위반 소지가 있다며 정정명령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가 증권채 발행을 부추기면서 기업 채권 시장을 교란한 것으로 보인다. 증권사는 LP(기관투자자)로서 레버리지 ETF의 주가가 급락한 경우 막대한 증거금을 부담해야 한다. 이때 회사채를 활용하면서 시장 자금을 빨아들였다. 지난달 키움증권(4000억원), 삼성증권(6000억원) 등이 회사채를, 미래에셋증권(1조3200억원)은 CP(기업어음)를 각각 발행했다.

부채자본시장(DCM) 관계자는 "레고랜드 사태를 계기로 규제나 압박 탓에 고객에게 약속한 금리를 맞춰주기 어렵게 됐다"며 "올해는 안정적일 것으로 믿었던 회사가 회생절차에 돌입하면서 거래가 소실됐고 금리가 오르는 악순환 상황"이라고 했다.

훌쩍 뛴 '증권신고서 정정요구'…매서워진 당국 눈치

금융감독원의 증권신고서 정정요구/그래픽=이지혜

자금조달 난이도를 둘러싼 산업계 하소연의 뒤편엔 최근 급증세에 접어든 금융감독원의 증권신고서 정정요구가 있다. 일반주주들은 환영하는 반면 운신의 폭이 좁아진 기업들은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졌다며 우려를 표명한다.

7일 머니투데이가 금융감독원의 전자공시·김상훈 국민의힘 의원 제출자료를 토대로 집계한 올해 증권신고서 정정요구는 이날까지 66건으로 나타났다. 8개월 만에 지난해(43건)와 2024년(56건)의 연간 건수를 뛰어넘은 수준이다.

기업별로 보면 연달아 정정요구를 받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올 들어 한울반도체와 상지건설은 4차례, 에이전트AI·휴림에이텍은 3차례 퇴짜를 맞았다.

당국의 정정요구는 증권신고서의 효력을 정지하는 효과를 낸다. 상장사는 주가 급등락 부담을 안게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기업 현장에선 금감원이 정식 요구에 돌입하기에 앞서 실무적 협의를 거치거나 '암묵적 제스처'를 감지하고 신고서를 정정한 사례가 적잖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정요구가 나타나는 범위는 전통적 갈등사안인 유상증자에서 합병·분할로 확산하는 추세다. 포괄적 주식교환에 대해 정정요구를 받은 상장사는 지난해 전무했지만, 올 들어선 4곳(현대지에프홀딩스·이마트·넷마블·우리금융지주)으로 증가했다.

송곳 심사가 급증한 배경엔 지난해 단행된 상법 개정이 자리한다. 기존 '회사의 이익'에 한정됐던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 범위가 '회사와 주주의 이익'으로 넓어지면서 당국의 재량권 역시 강화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일반주주 권익보호에 초점을 둔 자본시장 운영기조에 맞추다 보니 정무적 판단이 녹아들었다는 주장도 있다. 통상 금감원은 개별 정정요구에 대해 사유를 공개하지 않는다.

심사기조 변화를 둘러싼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유증 등 단기 악재에 민감한 일반주주 측에선 당국의 잣대가 엄밀해지면서 주주권익이 증진됐다고 호평하지만 대주주와 기업 측에선 유증에 따른 자금조달이나 기업 합병·분할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급감했다며 불안을 호소한다. 당국의 제동으로 경영문제가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정정요구를 한 차례 받으면 일정이 최소 수주 지연되기 마련인데 차입금 상환이나 운영자금 마련이 시급해 유증을 시도하던 기업의 경우 유동성 위기에 내몰릴 수 있다"며 "신고서 정정에 따른 자금 공백을 추가 단기차입 등으로 해결하더라도 중장기 재무부담을 감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증시 안팎에선 정정요구의 주된 발단인 유증에 대해 경영상황·지배구조별로 심사기준을 세분화·명확화해 예측 가능성을 높이면 주주·기업간 갈등을 완화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시장에선 유증 유형별로 주가 변동성이 다르게 나타나는 추세다.

홍지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주주배정·일반공모 방식 유증은 외부자금 조달 필요성과 주가 고평가 신호로 인식돼 단기적으로 부정적 시장반응이 나타나는 반면 제3자배정 유증은 전략적투자자의 참여와 기업가치에 대한 긍정적 신호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며 "2020~2022년 유증 상장사의 공시 후 누적초과수익률(CAR)을 살펴보면 발행 방식에 따라 뚜렷한 차이가 확인된다"고 밝혔다.

수출도 코스피도 잘나가는데…대출이자에 '쩔쩔' 기업들, 돈줄 말랐다

[서울=뉴시스] 김금보 기자 = 29일 서울 시내 한 은행 영업점이 비교적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6.07.29. kgb@newsis.com /사진=김금보

우리 경제가 역대 최고 수준의 수출 실적과 경상수지 흑자 등을 기록하고 있지만 기업들이 체감하는 자금조달 사정은 팍팍하다. 반도체 중심의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는 가운데 기업들은 직간접 금융 모든 부문에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기업들은 은행 차입뿐 아니라 회사채와 주식 발행 등 여러 조달 수단에서 애로를 겪고 있다.

이는 최근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비금융사 204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 자금조달 실태와 정책과제 조사'에서도 드러난다. 응답 기업들은 최근 1년간 가장 어려워진 조달 수단으로 '시중은행 차입'(43.6%)을 꼽았다. 당면한 가장 큰 문제로도 '고금리로 인한 대출이자 부담'(48.5%)을 지목했다.

지난달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기업의 이자 부담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기업들은 금리는 거시 여건에 맞물려 당장 내리기 어려운 만큼 시급한 정책과제로 '위험가중치 완화 통한 기업대출 확대'(52.5%)를 원했다. 위험가중치를 내리면 대출에 따른 은행의 손실 대비 자본 적립 부담이 줄어 대출 여력이 많아진다.

이처럼 금융권 대출 문턱이 높아지는데 또 다른 대안인 직접금융 조달은 단기 자금 위주로 흘러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업의 주식과 회사채 공모발행액은 126조575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조3570억원(15.6%) 감소했다. 이중 주식 발행은 1조2551억원이 줄어 29.6% 급감했다. 회사채는 15.2% 줄었다. 시장의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장기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됐다는 평가다.

반면 기업어음(CP)과 단기사채는 급증했다. 올 들어 6월까지 발행액은 총 1272조848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15조1069억원(68%)이나 증가했다.

업계 관계자는 "소위 '빚투' 자금을 대기 위한 증권사의 급전 조달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업들이 장기적 안정적 자금 계획을 세워 운용하기보다 당장의 운영자금을 해결하거나 기존 부채의 돌려막기(차환)에 급급한 측면이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가가 급등해도 자금조달에는 별다른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앞서 대한상의 조사는 코스피가 사상 최고치를 향해 올라가던 5~6월에 실시됐음에도 주가 상승과 관련해 신주발행 등을 통해 '자금조달 여건이 개선됐다'고 답한 곳은 14.7%에 그쳤다.

최은락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시중 유동성의 많고 적음보다 기업금융이 원활하게 작동해 기업이 필요한 시점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며 "기업금융은 은행 대출과 회사채, 주식 발행이 각각 별개로 작동하는 시장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구조여야 하고 기업이 상황에 맞게 여러 조달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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