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의무소각 시대가 열렸지만 자사주를 태우는 것만으로 기업가치가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조원대 자사주를 소각하고도 주가가 하락하는 등 소각 이후 주가 흐름도 기업마다 엇갈렸다. 자사주 소각은 주식 수를 줄여 주주가치를 높이는 효과가 있지만 기업의 이익창출력이나 성장성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한다는 지적이다. 그런 만큼 '소각=밸류업'이라는 단순한 등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 3월 시행된 개정 상법에 따라 기업이 취득한 자사주는 원칙적으로 취득일로부터 1년 안에 소각해야 한다. 시행 전 취득한 자사주도 시행일부터 1년6개월 안에 소각하는 것이 원칙이다. 임직원 보상이나 경영상 목적 등으로 자사주를 보유·처분하려면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제도 시행 이후 대규모 자사주 소각이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은 사례들이 나왔다. 현대차는 지난달 26일 보통주 129만1274주와 우선주 121만4332주 등 보유 중인 자사주 총 250만5606주를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전일 종가 기준 7891억원 규모다. 하지만 주가는 오히려 뒷걸음쳤다. 현대차 주가는 9월 28일 35만3500원(종가)을 기록하며 소각 결정 전일 대비 15.8% 하락했다.
제도 시행 전에도 대규모 자사주 소각이 지속적인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은 경우가 적잖았다. HMM은 지난해 8월 자사주 8180만1526주를 공개매수해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했다. 발행주식의 7.98%로 공개매수가 기준 2조1432억원이었다.
HMM 주가는 28일 2만1250원(종가)으로 소각을 결정하기 직전인 지난해 8월 13일 2만2550원 대비 5.8% 하락했다. 해운업황과 실적 전망 등 여러 변수가 영향을 미친 만큼 주가 하락을 소각 탓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대규모 소각 자체가 지속적인 주가 상승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드러났다.
최근 연구도 소각 자체와 기업가치 상승을 구분한다. 최동준 충남대 교수는 최근 공개한 논문에서 자사주 소각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고 분석했다. 자사주를 소각한다고 해서 회사에 새로운 현금이나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의무소각의 의미는 지배구조 개선에서 찾을 수 있다. 최 교수는 보유 자사주가 많을수록 이를 우호세력에 넘겨 대주주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활용할 여지도 크지만 의무소각이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면서 시장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기업가치는 결국 이익과 현금흐름, 성장투자와 자본효율성이 좌우한다는 지적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자사주 의무소각이 지배구조를 개선해 밸류업의 토대를 만드는 제도라면 그 위에서 실제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은 기업의 몫"이라며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태웠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느냐"라고 말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주식 수는 줄지만 회사가 벌어들이는 돈이 늘어나지는 않는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돈을 쓰면 주주에게 돌아가는 몫은 커지는 대신 회사가 가진 현금은 그만큼 줄어든다. 결국 기업가치를 높이는 핵심은 주식을 얼마나 많이 태우느냐보다 회사가 번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달렸다는 지적이다.
◇대규모 자사주 소각만으로 지속적 주가상승 기대 어려워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SK스퀘어는 자사주 의무소각 시행 이후인 지난 7월 약 430억원 규모의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지만 당일 주가는 1.84% 떨어졌다. 이날 종가는 110만원으로, 소각 결정 직전일보다 13.9% 낮다.
의무소각 시행 전인 지난해 2월 KB금융은 상반기 52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 계획을 내놨지만 계획 발표 다음 날 주가는 6.7% 급락했다. 신한지주는 지난해 상반기에만 65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을 추진했다. 적극적인 주주환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비은행 계열사 실적과 자본비율 등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목소리가 뒤따랐다. 자사주를 많이 소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꾸준히 이익을 내는 힘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얘기다.
주가는 실적 전망과 업황, 금리, 시장 상황 등 수많은 변수에 따라 움직인다. 이 같은 사례는 자사주 소각이 주가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특히 대규모 소각만으로는 지속적인 주가 상승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사주 소각이 곧바로 기업가치 상승을 뜻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보유한 자사주를 소각한다고 회사에 새로운 현금이 들어오거나 매출과 영업이익이 늘지는 않는다. 전체 주식 수는 줄지만 공장과 기술, 현금 등 회사의 자산이나 사업 수익성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배당을 하거나 자사주를 새로 사들여 소각하면 회사 현금이 실제로 줄어든다. 기업이 1000억원을 벌어 그대로 갖고 있으면 회사에 현금 1000억원이 남는다. 반대로 이 돈을 배당하거나 자사주를 사들이는 데 쓰면 주주에게 돈이 돌아가는 대신 회사 현금은 그만큼 줄어든다. 돈이 회사 안에 남느냐, 주주에게 넘어가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얼마나 태우나보다 번 돈 어디에 쓰나가 중요
최동준 충남대 교수는 최근 공개한 논문에서 자사주 소각 자체와 기업가치 상승을 구분했다. 최 교수는 자사주를 소각해도 회사가 보유한 자산이나 벌어들이는 이익이 달라지지 않는 만큼 소각 자체는 원칙적으로 기업가치에 중립적이라고 분석했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기업의 성장 단계와 투자 기회에 따라 적정한 주주환원 수준도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R&D(연구개발)나 설비투자, M&A(인수·합병)로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은 이익을 재투자하는 편이 기업가치 제고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반면 투자 기회가 부족한 기업은 현금을 과도하게 쌓아두기보다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을 늘리는 게 자본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에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 규모뿐 아니라 기업의 '자본배분' 정책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업에서 번 돈을 성장투자와 M&A, 부채 상환, 주주환원 등에 어떻게 배분하고, 이를 통해 얼마나 수익을 내는지가 기업가치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이 돈을 잘 벌어 좋은 투자처에 재투자하고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주주가치를 높이는 방법"이라며 "반대로 투자를 해도 충분한 수익을 내기 어렵다면 주주에게 돌려주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는 "진짜 밸류업은 무조건 많이 배당하거나 자사주를 많이 태우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가진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플래시 메모리 저장장치 업체 샌디스크는 지난달 향후 3년간 FCF(잉여현금흐름) 100%를 자사주 매입으로 주주에게 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루이스 비소스 샌디스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사업에 투자한 뒤" 남는 잉여현금은 주주에게 환원하겠다고 말했다. 성장을 위한 투자는 충실하게 하되 필요 이상의 현금은 쌓아두지 않고 주주에게 돌려주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 것이다. 메모리 고점론 여파로 지난 7월 29일 1015.89달러(종가)까지 내렸던 주가는 주주환원 원칙 발표 이후 상승세를 나타내며 지난 25일 1777.80달러로 75% 상승했다.
#일본 히타치는 밸류업 모범사례로 꼽힌다. 한때 부실기업으로 분류되던 히타치는 사업 포트폴리오를 대대적으로 수술해 우량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과거에는 상장 자회사를 여럿 거느렸지만 금속·건설 분야 등의 자회사를 차례로 완전자회사로 편입하거나 매각했다. 매각으로 확보한 현금은 핵심 사업 중심의 M&A(인수·합병)와 재투자에 썼다. 현재 히타치의 ROE(자기자본이익률)는 12%를 웃돌고 PBR(주가순자산비율)은 3.7배에 이른다.
이들 사례는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같은 주주환원 자체보다 기업의 성장과 경쟁력을 위한 자본배분이 밸류업의 핵심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 규모 발표만 이어지고 있다. 기업가치를 높이는 진정한 밸류업을 위해서는 주주환원과 자본배분 원칙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범준 가톨릭대 회계학과 교수는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의 전제 조건은 기업이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어야 주주에게 배분할 수 있다"며 "문제는 자사주 소각이나 TSR(총주주수익률)에만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회사 본연의 경쟁력을 위해 적절히 투자하는지, 미래를 준비하는지 등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사주 매입·소각 같은 주주환원은 기본적으로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사업에 필요한 투자 재원을 뺀 FCF를 주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리하게 자사주를 사들이느라 연구개발·설비투자를 소홀히 하면 기업 성장이라는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시장 역시 주주환원 자체보다 기업의 수익 창출력에 주목하고 있다. 연초 자사주 정책 기대감에 자사주 비중이 높은 기업의 주가가 큰 폭으로 뛰었다가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진 점이 이를 방증한다.
이정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3차 상법개정 이후, 자사주 프레임 변화' 보고서에서 "중장기적으로 주가를 결정하는 건 여전히 기업의 이익 창출 능력이며 자사주 정책은 이를 보완하는 변수에 불과하다"며 "이제는 자사주 소각 이후에도 ROE를 유지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기업을 선별하는 단계로, 투자 전략을 펀더멘털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투자자들 역시 한국 기업이 펀더멘털 강화를 밸류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병묵 한국거래소 뉴욕사무소장은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에 대해 기대와 우려가 공존한다"며 "자본효율성을 높여 ROE를 8%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등 ROE 제고 계획을 제시해 달라는 요청이 부쩍 많아졌다"고 해외 기관투자자들의 인식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