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를 정리하지 않고서 우리 스스로 선진국으로 부를 수 있을까. 이제 정말 그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길남 박사(KAIST 명예교수 겸 게이오대 객원교수)는 지난해 10월부터 넥슨컴퓨터박물관과 함께 국내 컴퓨터 개발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전 박사는 국내 최초 컴퓨터인 '세종 1호' 개발과 컴퓨터 및 인터넷 상용화를 주도했다. 인터넷 개발 및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2012년 '인터넷 명예의 전당(Internet Hall of Fame)'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헌정됐다.
KAIST 교수 시절에는 김정주 NXC 대표(넥슨 창업자)와 송재경 엑스엘게임즈 대표, 허진호 전 아이네트 대표 등을 길러냈다. 특히 김정주 대표와의 각별한 인연은 이번 작업을 넥슨컴퓨터박물관과 함께 진행하게 된 계기가 됐다. 김 대표는 지난해 넥슨 개발자 컨퍼런스(NDC 2014)에 참석해 기조강연자로 나선 전 박사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전 박사는 이번 작업에 대해 "역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선진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미국과 유럽이 IT 종주국이니까 그들의 역사만 배우면 된다는 생각은 식민지적 사고"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쉽게 말해 우리나라의 프로그래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라며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교육"이라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전 박사는 강진구 큐컴 대표와 박성배 ISAC CPU 연구소 대표, 박승규 아주대 교수 등 한국 IT산업의 산증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컴퓨터 개발 역사 워크숍 준비위원회(준비위)'를 조직했다. 준비위 구성원들은 각 분야의 '대부'로 불리는 인사들로 컴퓨터 개발 및 상용화 과정에서 전 박사와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들이 동일한 목표를 위해 뭉쳤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한 페이지다.
전 박사는 "역사를 만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며 "내게 그 역사를 제대로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해야 하지 않겠나"며 "미래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도 개발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준비위는 지난 19일 열린'NDC 2015'에서 현재까지 정리된 내용을 발표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넥슨컴퓨터박물관은 초기부터 준비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관련 자료의 지속적인 관리 및 보존을 담당한다. 이번 워크숍을 포함한 준비위의 활동과 관련된 모든 자료는 홈페이지(ComputerHistory.kr)를 통해 공개된다.
프로세서, 운영체제, 컴퓨터, 입출력(I/O) 등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은 당시 논문으로 발표된 내용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준비위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 이의 제기를 적극적으로 반영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최초'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전 박사는 "역사는 정리하는 작업이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며 "이번 워크숍을 5년 전에 개최했다면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더 많은 사람들이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며 "지금까지 10% 정도 정리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IT산업의 위기론에 대해선 "가볍게 세계 10위 안에 들어갈 정도면 괜찮게 하고 있는 것"이라며 "언론에서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전 박사는 "우리나라도 미국과 중국처럼 '한국 스타일'이라는 걸 만들어야 한다"며 "좀 더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에 진출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