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 KAIST(카이스트) 총장이 사임 의사를 철회했다. 리더십 장기 공백을 우려한 카이스트 이사회의 만류에 따라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지만, 1년여 기간 동안 상황을 방관해 온 정부와 이사회의 '책임 떠넘기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과학계에서 나온다.
13일 KAIST는 이 총장이 차기 총장 선임 시까지 기존 직무를 수행한다고 밝혔다. 이 총장의 임기는 2025년 2월 종료됐다.
이 총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최근 총장 선임 절차 지연으로 생긴 혼선과 불편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며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지만 이후 총장 선임 제도와 관련한 법률 개정 논의가 이어지는 등 카이스트 거버넌스와 관련된 중요한 변화가 논의되며 리더십 공백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대학 운영의 안정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이사회의 사의 만류에 따라 차기 총장 선임 시까지 직무를 수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 총장은 기존 16일 예정된 이임식을 취소하고 차기 총장 선임 시까지 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이어간다. 지난달 27일 카이스트 제18대 총장 선임안 부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힌 지 약 2주 만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교육·연구 기관의 총장이 사임이라는 중대 결정을 공표한 지 며칠 만에 결정을 번복한 셈이다.
이 총장이 결정을 번복한 데에는 카이스트 이사회와 관계 부처인 과기정통부의 설득이 있었다. 김명자 카이스트 이사장은 이날 "카이스트 거버넌스 변화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인데다 차기 총장도 선임되지 않은 상태인데 학교를 위해 총장의 공백 시기를 줄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 보고 (이 총장에게) 요청했다"고 했다.
과기정통부도 이 총장의 사임을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카이스트 이사회 이사직을 맡고 있는 이준배 과기정통부 미래인재정책국장은 "이사회를 포함해 여러 인물이 나서서 이 총장의 사임을 만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정통부 장관이 직접 이 총장과 만나 사임 의사를 철회하고 총장직을 이어가 줄 것을 설득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이같은 이사회와 정부의 태도를 두고 과학계에서는 '이 총장에게 책임 떠넘기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총장의 임기가 2025년 2월 종료됐는데도 과기정통부와 이사회가 1년 이상 손을 놓고 방관했기 때문이다. 총장 3배수 후보는 일찍이 2025년 3월 결정됐지만, 약 1년간 이사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결국 지난달 열린 이사회에서 이조차 부결됐다. 3명의 후보 중 누구도 '과반수'를 득표하지 못해서다.
카이스트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까지 나서 "카이스트 개교 55년 역사상 총장 선임안이 이사회에서 부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목소리를 높인 배경이다.
과학계에서는 "전형적인 정부 눈치 보기의 결과물"이라고 진단한다. 카이스트 총장 선임은 부처와 대통령실의 인사 검증을 거치는 만큼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다. 총장 선임 권한을 가진 카이스트 이사회에도 과기정통부를 비롯해 교육부, 기획예산처 고위공무원이 포진해 있다.
후폭풍도 거세다. 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지난 3일 카이스트 총장 선출에 교수, 학생, 직원 등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총장 선출 방식을 개편하는 내용의 '한국과학기술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총장 선거에 직접선거방식을 채택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는 게 골자다. 이는 총학생회를 비롯한 카이스트 곳곳에서 "폐쇄적인 총장 선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과 관련 있다.
이 총장은 카이스트를 둘러싼 잡음을 미봉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최소 6개월 이상 총장직을 이어가게 됐다. 이 총장은 "마지막까지 책임을 다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