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자가 미국 공보험 메디케이드가 보장하는 의약품과 향후 출시할 신약의 가격을 대폭 낮추고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면서 의약품 고관세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국내 개별 제약·바이오 기업 대다수는 미국 의약품 관세 문제의 해법을 직접 찾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가 의약품 관세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빠르게 확정해야 한단 목소리가 나온다. 또 국내 기업들도 시장 다변화 등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위험을 분산해야 한단 분석이다.
1일 로이터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화이자는 지난 9월 30일(현지시간) 메디케이드에서 보장하는 대부분의 치료제 가격을 최혜국 대우(MFN) 수준으로 인하하고, 향후 미국에서 신약을 출시할 때 MFN 가격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화이자는 1일부터 시행될 미국의 수입 의약품 관세 부과를 3년간 유예받게 됐다.
이를 두고 화이자가 미국 의약품 시장에서 가장 작은 부분을 내어줌으로써 트럼프 행정부의 약가 인하 및 관세 정책과 관련한 불확실성을 해소했단 평가가 나온다. 미국 연방보험청(CMS)에 따르면 2023년 메디케이드 지출은 전체 국가보건지출(NHE)의 18%에 해당한다. 메디케어와 민간 건강보험은 각각 21%, 30%를 차지했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다른 제약사들과도 유사한 협정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제품을 판매 중인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은 단기적으로 미국의 약가 인하 정책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계속 상황을 지켜보겠단 입장이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글로벌 제약사와 경쟁하고 있는 경우엔 경쟁사의 약가 인하 결정이 경쟁 조건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서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내 기업에까지 약가 인하에 대한 압박이 영향을 미치려면 한참 걸리지 않을까 싶다"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일단 17개 빅파마에 서한을 보낸 만큼 그쪽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이뤄져 세부사항이 공개돼야 국내 기업도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례를 통해 다른 제약사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국내 제약사들은 메이저 플레이어가 아닌 만큼 주도적으로 해법을 찾기 어려우니 글로벌 제약사들의 결정에 대한 후폭풍을 고려하며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화이자가 직접 공장을 짓는 동안 미국에서 판매할 제품은 미국 소재 위탁개발생산(CDMO) 업체에 생산을 맡길 수도 있고, 향후 중국 시장에 대한 전략을 변경할 수도 있어서 잘 지켜봐야 할 부분"이라며 "글로벌 제약사들의 투자 계획과 사업 전략이 변화하고 있는 지금 상황은 국내 기업들이 미국을 제외한 시장에 더 적극적으로 진출하며 시장 다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적기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업계에선 화이자가 이번에 의약품 관세 적용을 유예받은 배경으로 약가 인하보다 향후 수년간 미국에 700억달러(약 98조2730억원)를 투자하기로 한 결정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의견이 우세하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원하는 것은 미국에서의 생산이고, 이를 위해 약가 인하 압박을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단 분석이다.
국내에선 셀트리온이 최근 미국 소재 일라이 릴리 공장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정면 돌파를 택했지만 대부분의 국내 기업은 대규모 투자에 한계가 있다. 사실상 이들은 정부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구두로 합의한 최혜국 대우에 기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아직 최종 협상이 끝나지 않아 여전히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일본은 의약품에 대해 최혜국 대우(MFN)를 적용받아 15%의 관세를 적용받는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미국에서 약가를 낮추는 대신 한국을 포함한 주요 선진국에서 약가를 높일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혹은 미국에서 약가를 유지하는 대신 선진국 약가를 인상하거나 약가가 너무 낮은 곳에선 판매를 철수함으로써 미국이 참조할 약가를 높이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공공정책 연구기관 랜드 코포레이션에 따르면 한국 약가는 미국의 25.57% 수준이다.
이 부회장은 "글로벌 제약사들이 제3국에서 약가를 높여 미국에서 약가를 낮추면서 보게 되는 손해를 떠넘길 가능성이 높다"며 "우리나라가 높아진 약가를 수용하지 않게 되면 규모가 큰 시장이 아니기 때문에 제약사가 (신약을 출시할 때) 우리나라를 패싱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제약사 입장에선 경쟁이 없는 신약의 경우 미국 외 지역에서 약가를 올려도 시장 점유율에 영향이 없기 때문에 가격을 올릴 수 있다"며 "반면 제네릭(복제약)이나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등으로 이미 경쟁이 활발한 약물의 가격을 인상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