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사 일라이 릴리가 글로벌 오픈 이노베이션 프로그램 '릴리 게이트웨이 랩스(LGL)'의 국내 거점 설립을 결정하며 한국을 중국에 이은 새로운 신약개발의 요충지로 낙점했다. 국내 바이오 산업에 대한 글로벌 경쟁력이 입증됐단 평가와 함께 정부의 세밀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일라이 릴리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양사는 LGL의 첫 번째 국내 거점을 인천 송도 삼성바이오로직스 제2바이오캠퍼스에 2027년 준공 예정인 C랩 아웃사이드에 설립한다. 향후 입주사 선발 및 육성 등 전반적인 운영을 공동 진행한다.
C랩 아웃사이드는 삼성전자의 사외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이다. 현재 시리즈 B 이하 단계의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입주사를 선정해 최대 1억원의 사업지원금 지급, 전용 사무공간 제공, 맞춤형 성장 프로그램 등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에 향후 설립될 LGL 입주사도 비상장 바이오 벤처 위주로 선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업계 관계자는 "빅파마들이 국내 바이오텍 생태계의 역동성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한국을 중국과 더불어 자신들이 신규 파이프라인을 조기에 발굴할 수 있는 영토로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며 "LGL 프로그램은 상장사보단 초기 단계 스타트업의 새로운 플랫폼 기술이나 파이프라인을 발굴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향후 일라이 릴리는 LGL을 통해 초기 단계의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국내 바이오텍과 협업하며 빠르게 신규 플랫폼 기술이나 파이프라인을 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직접 투자 가능성도 열려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또한 LGL 입주사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차세대 모달리티(치료접근법) 생산 역량을 확보하고 추가적인 사업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업계에선 일라이 릴리가 미국, 중국에 이어 한국을 LGL의 신규 거점 국가로 택했단 점에 주목한다. 글로벌 의약품시장분석기관 사이트라인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파이프라인(신약후보물질)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그 중에서 개발 단계에 있는 건 약 14.2%에 불과해 더 많은 파이프라인에 대한 개발 가속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라이 릴리는 이미 중국 바이오텍들과 다양한 협업으로 일종의 '성공 방정식'을 구축한 바 있다. 대표적인 파트너사가 중국 이노벤트다. 두 회사는 2015년부터 현재까지 총 7건의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지난 2월엔 총 88억5000만달러(약 13조원) 규모의 전략적 협업 계약을 맺고, 이노벤트가 중국에서 임상 2상까지 개념입증(PoC)을 수행하고 일라이 릴리가 글로벌 개발을 맡는 방식으로 협력 모델을 확장했다.
김승민 미래에셋연구원은 "빅파마의 중국 혁신 소싱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며 "릴리와 이노벤트의 딜은 중국 R&D 역량의 부상을 가장 극적으로 활용한 사례"라고 분석했다. 이어 "이노벤트 입장에선 빅파마 검증을 받은 반복 가능한 파이프라인 가속화 모델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일라이 릴리뿐 아니라 로슈 등 글로벌 빅파마들의 국내 투자가 본격화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정책적 지원을 통해 이를 지속가능한 형태로 발전시켜야 한단 목소리도 나온다. 일라이 릴리는 2024년 영국에 LGL 거점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나, 영국 정부의 신약개발 투자 부족과 영국 바이오 산업에 대한 우려 등을 이유로 지난해 해당 계획을 중단한 바 있다.
이승규 한국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이제는 국내 바이오 산업에 글로벌 투자가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할 시점에 빅파마가 직접 자금을 투자하기로 한 만큼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중요하다"며 "바이오 산업은 직접적으로 정부의 규제와 맞닿는 특성이 있고, 모험자본의 성격이 있기 때문에 초반에 정부의 지원책이 같이 매칭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