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자에 한해 의사가 이전에 처방한 의약품과 같은 제품을 약사가 다시 조제·판매할 수 있도록 한 '처방전 리필제'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입법에 속도가 붙은 '성분명처방'에 이어 의료계의 반대가 큰 처방전 리필제가 연이어 발의되면서 의사-약사의 갈등도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2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최근 국회에서 발의된 약사법 개정안에 대해 의사직역 단체별 의견을 수렴 중이다. 전진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6일 대표발의한 이 법안은 약사가 의사·치과의사의 처방전 없이 만성질환자의 기존 처방의약품을 조제할 수 있도록 한 게 골자다.
현행법상 약사는 '재해발생으로 사실상 의료기관이 없게 돼 재해구호를 위해 조제하는 경우' 의사나 치과의사의 처방전 없이 의약품 조제가 가능하다. 개정안은 재해구호 목적 외에도 재해발생시 '만성질환자의 만성질환 관리를 위해 이전에 처방받은 의약품과 동일한 의약품을 조제·판매하는 경우'를 신설, 대상을 만성질환 대상으로 넓혔다. 처방의약품의 종류와 조제·판매량, 처방전 유효기간은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한다.
처방전 리필제는 미국·영국·대만·일본 등 해외에서 이미 시행되는 제도다. 상태가 안정적인 환자가 보유한 약이 소진돼 추가처방이 필요한 경우 병원방문 없이도 약국에서 약을 타갈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다. 약사계는 180일, 더 길게는 1년가량의 장기처방 사례가 증가함에 따라 조제약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김위학 서울시약사회장은 머니투데이 기자와 통화에서 "약물보관의 안전성과 의약품 폐기 등 장기처방에 따른 여러 문제가 있다"며 "안정적 관리가 되는 환자도 병원을 굳이 방문해야 하는 비효율 문제가 있다. 한 번 처방받아 1~2회 리필하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의사들은 외려 환자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성근 의협 대변인은 "동일한 약만 처방받으면 될지, 다른 약이 더 필요한지 등에 대해 환자가 임의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환자의 안전을 위한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비대면진료 제도화로 환자의 편의성을 높였는데 리필제까지 도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도 덧붙였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도 페이스북을 통해 "약사는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에 환자의 혈압도, 혈당도 잴 수 없다"며 "진료 없이 약사가 처방전을 재탕하는 제도"라고 비판했다.
의료계의 반발이 거센 약사법안이 잇따라 발의되면서 의사-약사의 갈등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이어진다. 앞서 지난해 대체조제 사후통보 절차를 간소화한 법안이 통과된 데 이어 최근엔 의약품 명칭 대신 성분명을 기재하도록 의무화한 법안도 추진 중이다.
특히 의협 등 의사단체는 지난 11일 '성분명처방 의무화' 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제1법안심사소위원회 심사안건으로 오른 것을 두고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택우 의협 회장은 "의사는 진단·처방, 약사는 조제·복약지도를 맡는 게 의약분업의 대원칙"이라며 "성분명처방 강행시 의약분업제도 자체의 전면 백지화를 선언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해당 법안은 다음달로 의결이 연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