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특파원으로 근무하다 알게 된 한국 외식 프랜차이즈업체 대표로부터 수 년 전 직원들에게 당한 사연을 들은 적 있다. 그는 중국에서 갖은 시행착오 끝에 간신히 매장을 하나 냈다. 한국 같았으면 짧게 끝났을 개장 업무를 중국 특유의 상황을 몰라 수 개월 간 직원들과 좌충우돌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직원들과 남다른 믿음을 쌓았다. 일부 직원들은 한국으로 연수도 보내 잘 나가는 매장의 노하우도 보게 했다. 그런데 개업한 지 1년이 좀 지났을까. 몇몇 직원들이 사표를 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장 근처에 버젓이 메뉴와 상호까지 비슷한 짝퉁 매장을 차리더라고 했다.
그때 그는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라는 말이 현실과는 너무 동 떨어진 말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쓰지 않되, 한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
요즘 산업은행 홍기택 전 회장의 행보를 보면서 딱 이 말이 떠올랐다. 이 여덟 글자에 담긴 뜻이 사기업이 아닌 한 나라의 국정으로 확대될 경우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도 곱씹어 보게 됐다.
홍 전 회장은 폴리페서(polifessor)였다. 정치(politics)하는 교수(professor)였다. 서강대 출신인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동문으로 '경제 과외 교사'를 하며 신뢰를 얻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2013년 4월 산업은행 회장직에 오른다. 여기까지는 '의인불용'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스러져가는 대우조선해양의 최대주주였다. 홍 전 회장이 아무리 리스크 전문가라고 하지만 산업은행은 폴리페서인 그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그릇이었다. 우리가 정말 홍 전 회장에게 바라는 것은 상황이 다 벌어진 후 그가 관치금융의 압박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그토록 바꾸려 했다던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이 왜, 어떤 이유로 이 지경이 됐느냐는 그 '과정'의 진술이다. 그가 말한 더 센 지지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다시 돌아가보자. 홍 전 회장은 산업은행 전 회장으로서 책임을 지고, 의인불용에서 끝났어야 할 인물이다. 그런데 청와대는 특유의 신뢰로 홍 전 회장을 다시 지난 2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초대 부총재로 내보낸다. AIIB는 아시아 각국의 인프라시설 투자를 위해 설립된 다국적 금융기구로 앞으로 연간 5000억 달러가 넘는 사업을 이끌 전망이다. 한국은 지분율 5위에 달한다. 이런 위상 덕에 당시 이 자리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경합을 벌였다. 하지만 이 경합마저 너무 싱겁게 끝났다.
AIIB 부총재가 정부 각 부처와 수없는 조율을 해야 하는데 홍 전 회장의 능력이나 소통에 문제가 없는지, 앞으로 대우조선해양 검찰 수사가 홍 전 회장의 AIIB 내 행보에 걸림돌이 되진 않는지 전혀 고려치 않은 인사였다. 한국에게 배정된 AIIB 부총재직은 홍 전 회장이 물러난다고 해서 또 다시 한국 몫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의인불용 용인불의', 한번 믿으면 끝까지 밀어주는 뚝심의 완결판을 보는 듯하다.
모든 운동선수들은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 혹독한 훈련을 버티지만, 그 훈련을 버틴다고 모두가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하지 않은 선수들은 올림픽 무대에 설 수도 없고, 서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폴리페서, 홍 전 회장은 어떨까. 그는 산업은행 수장이나 AIIB 부총재를 맡을만한 훈련과 경험을 쌓았던 인물일까.
빅배스(Big bath). 기업이 과거 손실을 한 회계년도에 한꺼번에 반영하는 것으로, 대우조선해양은 지난해 말 3조2000억원의 영업손실을 드러내며 빅배스를 했다. 이 빅배스가 어디 기업에만 해당되랴. 이제 1년8개월 임기를 남긴 박근혜 정권 스스로가 이전 2/3 임기의 빅배스를 이제라도 해주기 바란다면 너무 큰 기대일까. 당장 '의인불용, 용인불의' 과정에서의 오점부터 털어내기 바란다. 구조조정은 꼭 기업들만 하라는 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