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달러 고정 환율제(페그제)를 쓰는 나라들이 달러 강세로 궁지에 몰렸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페그(peg)는 '말뚝', '고정하다'라는 뜻이다. 한 나라의 통화 가치를 특정 국가 통화에 고정시켜 환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걸 페그제라고 한다. 홍콩달러의 경우 1983년부터 '1달러=7.8홍콩달러'의 고정환율에 묶여 있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카타르 △오만 △쿠웨이트 등 걸프협력회의(GCC)에 속한 걸프지역 6개국도 모두 달러 페그제를 쓴다. 쿠웨이트는 달러를 비롯한 주요 통화를 한 데 모은 바스켓에 연동된 환율제도를 쓰지만 시장에서는 비공개인 이 바스켓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이 70% 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달러 페그제를 쓰면 환율 변동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이점이 있지만 이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든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 달러를 매입해 시중에 풀어야 한다. 금융정보업체 팩트셋에 따르면 GCC 6개국의 외환보유액은 2014년 정점에서 2000억달러 감소했다. 20% 넘게 준 셈이다. 2014년 중반에 시작된 국제유가 급락세에 따른 경제난과 재정난도 걸프지역 국가들의 페그제 유지 비용 부담을 가중시켰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는 급기야 지난 6월 달러 페그제를 포기했다. 이후 이 나라 통화인 나이라화 가치는 30% 넘게 폭락했다. 이 여파로 지난 10월 물가상승률이 10년 만에 최고인 18.3%로 치솟았다. 지난 8월 역시 달러 페그제를 포기한 카자흐스탄의 물가상승률도 16.4%로 급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집권은 달러 강세를 더 부추길 전망이다. 재정부양을 비롯한 그의 친성장 정책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금리인상을 더 자극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FRB는 14일에 끝나는 올해 마지막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1년 만에 다시 기준금리 인상 포문을 열 전망이다. WSJ의 설문에 참여한 이코노미스트들은 현재 0.25-0.50%인 미국의 기준금리가 내년 말에 2%를 웃돌 것으로 내다봤다. 10월(1.75%)에 비해 전망치가 훌쩍 높아졌다.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는 지난 5월 92로 저점을 찍은 뒤 최근 100선을 훌쩍 웃돌고 있다.
달러 강세로 달러 페그제 유지 부담이 커질 것이라는 관측은 달러에 묶인 통화에 대한 약세 베팅을 자극하고 있다. 특히 홍콩달러는 경제적으로 밀접한 중국의 위안화 약세 부담까지 안고 있어 홍콩이 페그제를 포기할지 모른다는 관측이 세를 불리고 있다.
그러나 달러 페그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 않다. 토머스 콴 하베스트글로벌인베스트먼트 CIO(최고투자책임자)는 "홍콩의 달러 페그제는 30년 넘게 제 자리를 지켰다"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홍콩은 달러 페그제로 조지 소로스가 이끈 퀀텀펀드 등의 환투기를 막아냈다고 지적했다. 달러 페그제의 효용이 큰 만큼 홍콩이 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중동지역 국가들의 경우 외환보유고가 여전히 탄탄하고 최근 국제유가의 반등세도 고무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