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AI 패권을 점유한 가운데 중견국들은 완전한 기술 자립보다는 전략적 유연성으로 '소버린 AI(AI 주권)'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바렐라 산도발, 이사벨라 윌킨슨, 알렉스 크라소돔스키, 로완 윌킨슨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Chatham House) 디지털 사회 프로그램 연구원들은 '중견국들이 미국과 중국의 인공지능(AI) 패권을 극복하는 방법 (How middle powers can weather US and Chinese AI dominance)' 보고서에서 "AI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에 대한 기술적 의존은 불가피하다"며 "중견국들은 완전한 기술 자립이 아닌 전략적 유연성을 통해 지속가능한 소버린 AI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먼저 '소버린 AI'의 개념을 '국가가 외부 행위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없이 자국의 이익에 맞게 AI를 개발·배치·통제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함께 최근 AI 경쟁에서 뒤처질 것을 우려한 중견국들은 △국가안보 △경제 △공공서비스 △국가적 가치와 문화 △지정학적 경쟁과 협상 등에서의 이익을 위해 경쟁적으로 소버린 AI를 구축에 나서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나 소버린 AI를 추구하는 중견국들이 직면한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것으로 바라봤다. 현재 AI 생태계가 데이터, 연산 능력, 모델, 인재, 인프라 등 거의 모든 핵심 요소에서 미국과 중국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AI 연산 능력의 핵심인 '컴퓨팅 파워' 측면에서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미국의 IT 기업들은 이미 글로벌 시장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에 있다. 데이터 측면에서도 글로벌 플랫폼을 보유한 미국과 중국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있지만 중견국은 데이터 규모와 다양성 모두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 인재와 지식재산 역시 미국과 중국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견국과의 기술 격차는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이처럼 중견국은 미중 양국에 절대적 열세에 있지만 소버린 AI 구축을 포기할 정도로 완전히 무력한 상황은 아니라고 봤다. 보고서는 소버린 AI의 구성요소를 데이터, 컴퓨팅, 모델, 에너지, 인프라, 산업, 인재, 신뢰의 8가지로 구분하고, 각 요소별로 선택적 접근을 통해 제한적인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데이터센터와 연결망 투자, AI 산업의 파트너십과 스타트업 생태계 조성, AI 인재 양성 시스템, 국가차원의 AI 모델 개발 등을 통해 자국에게 적합한 AI 기술 확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AI 생태계 조성에 있어 막대한 에너지가 소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가용 에너지가 풍부한 중견국은 소버린 AI 구축에 유리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보고서는 소버린 AI 구축을 위한 중견국의 네 가지 전략 경로를 제시했다. 먼저 '전문화 전략'으로 AI 공급망의 특정 부분에서 지배력과 협상력을 높이는 방식이다. 하드웨어 부품, 특수 칩 제조, 데이터 센터용 에너지 인프라, 특정 AI 애플리케이션 등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일종의 틈새 전략인 셈이다. 보고서는 "전문화를 위해선 글로벌 AI 공급망에서 첨단 기술 역량의 예상 궤적에 대한 정보와 대규모 투자가 모두 필요하다"면서 "중견국은 인적 자본과 연구 생태계 투자 등 자체 AI 기반 구축에 집중하고 강력한 AI 기업과의 전략적 파트너십 및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짚었다.
다음으로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AI 기술 생태계에 정렬하는 '동맹 전략'이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여러 파트너십에 분산시키거나 독자적인 역량을 구축하기보다 초강대국의 생태계에 깊이 편입함으로써 보장된 접근성, 우대 조치, 안보, 비용 절감을 도모하는 것이다. 다만 강대국이 제시하는 기준이나 가치 등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등 자율성 상실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협력 조건을 공식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유사 입장에 처한 중견국가들 사이의 협력과 공동 투자, 즉 '공유 전략'도 필수로 꼽았다. 이러한 방식은 개별 국가의 역량과 기술적 한계를 보완하고 강대국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 다양한 공급자를 활용해 일방적인 의존을 분산하는 '헤징 전략' 역시 중요한 과제로 언급했다. 헤징의 목표는 공급업체를 전환하고 특정 초강대국의 기술 생태계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고서는 소버린 AI를 추구하는 중견국에게 있어 진정한 과제는 강대국의 전면적인 전략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글로벌 AI 질서 속에서 탄력적이며 지속가능한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봤다. 저자들은 "중견국들은 단순한 '승리' 혹은 '패배'라는 이분법을 넘어 전문화할 분야, 의존할 분야, 협력할 분야에 대한 신중한 선택을 통해 많은 이들이 혜택을 공유하는 진정한 소버린 AI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