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술 중심지 실리콘밸리에서 CEO 굿즈 열풍이 불고 있다. 젠슨 황의 얼굴이 박힌 스웨터가 24만원에 거래되고, 방산 스타트업 안두릴 인더스트리스가 내놓은 팔머 럭키 CEO 스타일의 하와이안 셔츠는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다. 기술이 권력이 된 시대, 기술 거물들의 카리스마와 서사를 소비하는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서 열린 엔비디아 GPU 기술 콘퍼런스에 참가한 페이팔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하드빅 나하타(28)는 행사장 한 쪽에 마련된 굿즈 판매대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녹색 스웨터 전면에 젠슨 황의 얼굴이 새겨진 녹색 스웨터를 살지 말지 고민해서다. 가격은 178달러. 당시 엔비디아 주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젠슨 황은 실리콘밸리의 테일러 스위프트 같은 존재"라며 "그만이 가진 아우라가 있다"고 말했다.
WSJ에 따르면 과거 테크 CEO들은 공부는 잘하지만 매력은 없는 '너드(nerd)'에 가까웠다. 빌 게이츠나 창업 초기 제프 베이조스가 그 예다. 반면 지금은 CEO들이 더 대담하고 반항적인, 이른바 '브로(bro) 스타일'을 내세운다. 젠슨 황은 1300만원짜리 톰 포드 가죽 재킷을 입고 무대 위에 등장하고, 팔머 럭키는 화려한 하와이안 셔츠를 트레이드마크로 삼는다. 팔란티어 창업자 알렉스 카프는 헝클어진 머리와 직설적인 화법, 거침없이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인물로 유명하다.
브로의 이미지는 굿즈로 연결되고 있다. 지난해 팔란티어가 출시한 한정판 티셔츠에는 카프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엔 그가 즐겨 쓰는 말인 "지배하라(Dominate)"가 함께 새겨졌다. 75달러짜리 이 티셔츠는 몇 시간 만에 완판됐다. 안두릴은 럭키 CEO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와이안 셔츠를 판매한다. 79.99달러짜리 이 제품 역시 1차 판매 때 매진됐다.
기업들은 기꺼이 리더의 상징성과 팬덤을 자산으로 활용하려 한다. 임원 코칭 전문가 알리사 콘은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대담하고 다소 기이한 개성을 갖고 있고 사람들은 그런 개성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면서 "CEO 얼굴을 굿즈에 새긴다는 건 회사 이미지를 인물의 페르소나와 동일시하겠단 선언이기도 하다"고 분석했다.
사실 대부분의 업계에서 CEO 얼굴이 박힌 옷을 입고 다니면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선 다르다. WSJ은 "테크 거물들의 얼굴을 입는 일은 소속감과 취향, 투자 의향을 드러내는 소비 방식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기술 붐이 있다. 첨단 기술이 세상의 판도를 바꾸는 시대, 그 기술을 이끄는 리더들은 자연스럽게 지위가 격상되기 마련이다. 엔비디아는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 됐고 젠슨 황은 각국 정상들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거론된다. 팬들이 기술 리더들에게 열광하는 건 기술이 바꿀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그 미래를 만드는 사람과 같은 편에 서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인 감정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