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들'은 예상했을까…워싱턴 삼킨 월가[특파원칼럼]

뉴욕=심재현 특파원
2026.07.08 04:30
자유의 여신상 너머로 미국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야경이 보인다. /로이터=뉴스1

"미국을 움직이는 진짜 엔진은 백악관이 아니라 월스트리트다."

미국 독립기념일이자 건국(독립선언) 250주년이었던 지난 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금융가에서 만난 12년차 헤지펀드 매니저 데이비드(39)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미국 전역이 애국주의 행사로 들썩였지만 그는 지난 250년 동안 세계 최강국을 떠받친 힘의 정점에 금융자본이 있다고 확신했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의회를 장악하든 결국 정책을 뒷받침하는 국채를 사들이고 자금을 공급하는 건 시장의 몫이라는 얘기였다.

미국이 금융만으로 움직이는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2026년의 미국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금융화'라는 데는 이견이 많지 않다. 돈은 교환 수단을 넘어 기업의 운명과 기술의 의사결정 방식, 정치까지 규정하는 질서가 됐다.

'혁신의 심장'이라 불리던 실리콘밸리도 예외가 아니다. 한때 세상을 바꿀 기술을 꿈꾸던 창업자들의 무대가 이제는 투자 회수(엑시트)를 전제로 움직이는 금융 공학의 또다른 장이 됐다. 기업의 가치와 혁신의 방향 역시 투자자의 기대와 시장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3월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창업자 케빈(34)은 "혁신의 가치는 이제 기술 자체보다 벤처캐피털과 사모펀드가 원하는 일정에 맞춰 얼마나 빨리 기업가치를 키울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원천기술 개발에 10년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 월가 출신 인사들의 반대로 무산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며 "창업자들조차 기술보다 투자설명서와 기업가치 스토리를 만드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고 했다.

워싱턴 정가 역시 금융화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표로 움직이지만 선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금융권의 정치자금과 로비는 워싱턴 권력의 중요 변수로 자리 잡았다.

정치자금 감시단체 오픈시크릿의 브렌던 글래빈 선임연구원은 "건국 250주년을 맞은 올해 중간선거 국면에서도 금융권의 정치자금은 역대 최고 수준"이라며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반(反)월가'를 외치더라도 정책의 세부 내용은 월가 큰손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상에선 이런 금융화의 결과가 자산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격차 확대로 나타나고 있다. 뉴저지의 한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직장인 사라(34)는 건국 250주년 축제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뉴스에선 주가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월가는 성과급 잔치를 벌인다고 하지만 제 월급은 물가도 못 따라가요. 집값은 치솟고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졌습니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월가 금융계좌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꿈 같다"고 말했다.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가 내세운 가치는 평등과 행복추구권, 그리고 이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였다. 250년이 지난 오늘 미국은 그 힘을 바탕으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경제대국이 됐지만 정치는 분열하고 사회 양극화의 골은 더 깊어졌다. 그 사이 금융은 경제를 넘어 정치와 기술, 산업 전반의 의사결정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언어가 됐다. 니킬 팔 싱 뉴욕대 교수는 최근 '더 가디언' 기고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가 소수 자본가들에게 저당 잡혔다"고 지적했다.

250년 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견제 없는 권력을 경계했다. 오늘날 미국이 던지는 질문 역시 여기에 있다. 자본이 새로운 권력이 된 시대, 시장의 효율성과 민주적 견제의 균형을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자본시장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는 한국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 건국 250주년을 맞은 독립기념일(7월 4일) 새벽녘 미국 워싱턴DC 연방의회의사당 뒤편으로 해가 뜨고 있다. /로이터=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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