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간선거를 앞두고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기요금 문제가 주요 쟁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데이터센터가 들어서면 막대한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발전·송전망 투자가 필요한데 그 비용이 일반 가정의 전기요금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우려다. AI 투자를 뒷받침할 전기의 비용을 누가 낼 것인가가 유권자의 관심사가 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이 논쟁에 뛰어들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일 미국 오하이오주 유세에서 데이터센터 건설을 옹호하며 "오하이오가 (데이터센터 건설로) 벌 수 있는 돈이 정말 많다. 데이터센터 (건설을) 그냥 막아버릴 수는 없다"며 "그러면 중국으로 갈 것"이라고 밝혔다.
효율 좋아지자 사용처도 확대…제번스의 역설
AI 사용이 확대되면서 필요 전력은 빠르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 에너지부 산하 로런스버클리국립연구소(LBNL)에 따르면 지난 2024년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는 192테라와트시(TWh)로 미국 전체 전력소비의 4.7%를 차지했다. LBNL은 기준 시나리오에서 오는 2030년 전력소비가 649TWh로 2024년의 약 3.4배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전체 전력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1.8%로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AI는 갈수록 효율적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AI 인덱스 2025'에 따르면 GPT-3.5 수준의 성능을 내는 AI의 추론 비용은 2022년 11월 100만 토큰당 20달러에서 2024년 10월 0.07달러로 28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AI용 하드웨어의 에너지 효율도 연평균 약 40%씩 개선됐다. 같은 수준의 AI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은 급격히 낮아지고, 같은 양의 연산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전력도 줄어드는 방향으로 기술이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전체 전력소비도 감소하게 될까. 꼭 그렇지는 않을 수 있다. 이 질문은 160여년 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가 석탄 소비량을 관찰하며 제시한 '제번스의 역설'을 떠올리게 한다.
제번스는 1865년 출간한 '석탄 문제'에서 증기기관의 효율 향상이 석탄 소비 감소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효율 향상으로 단위 비용이 낮아지면 증기기관을 사용할 만한 산업과 작업이 늘어나 전체 석탄 소비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는 게 제번스의 주장이다. 효율 향상으로 아낀 자원보다 사용처 확대에 따라 투입된 자원이 더 많아지는 구조다.
제번스에 따르면 1769년의 구형 증기기관은 석탄 84파운드(약 38㎏)를 태워 약 559만파운드(약 2500톤)의 물을 1피트(약 30㎝) 높이까지 퍼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증기기관의 효율은 빠르게 개선됐고 제번스는 100년도 채 되지 않아 같은 양의 연료로 할 수 있는 일이 최소 10배 이상 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석탄 사용은 줄지 않았다. 영국의 석탄 생산량은 1760년대 연평균 약 520만톤 수준에서 1859년 약 7200만톤으로 14배 가까이 늘었다. 제번스는 효율 향상으로 동력 비용이 낮아지면서 증기기관을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산업과 작업이 넓어진 것을 그 배경으로 봤다.
최근 AI 관련 산업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AI 토큰 비용이 낮아지면서 이전에는 경제성이 맞지 않았던 영역에도 AI를 적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교육용 AI 서비스 스터디페치(StudyFetch)가 한 사례다. 엔비디아에 따르면 스터디페치는 음성 기반 튜터와 실시간 개인화 기능, 에이전트형 학습 서비스 등에 AI를 적용했다. 강의 음성 전사 등에 활용되는 비용이 약 10분의 1로 줄면서 기존 예산으로는 도입하기 어려웠던 서비스까지 AI 도입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이 다른 서비스에서 반복된다면 AI 한 번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전력은 줄더라도 전체 연산량과 전력 소비는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미 상원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동일한 수준의 AI를 사용하는 비용은 약 12개월마다 10분의 1로 떨어지고 있으며 가격이 낮아지면 이용량은 훨씬 늘어난다"고 밝혔다.
AI 발전, 사용량 증폭시킬 것…전력이 새 병목
게다가 AI 자체의 능력이 빠르게 향상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고 있다. 초기 생성형 AI가 글을 쓰고 요약하는 데 주로 쓰였다면 이제는 영상 생성과 복잡한 추론, 여러 단계를 스스로 수행하는 AI 에이전트 등으로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AI가 텍스트와 영상을 만드는 것을 넘어 과학 연구와 제조업, 자율주행 등으로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분석했다.
IEA는 2025년 약 485TWh였던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소비가 2030년 약 950TWh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에서는 2030년까지 늘어나는 전체 전력수요의 거의 절반을 데이터센터가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전력 공급이 수요만큼 빠르게 늘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는 비교적 빠르게 지을 수 있지만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에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하다. IEA에 따르면 선진국에서 새로운 송전선을 건설하는 데 통상 4~8년이 걸린다. 변압기와 케이블 등 핵심 장비의 대기기간도 최근 3년 사이 두 배로 늘었고 가스발전용 터빈도 주문에서 인도까지 수년이 걸린다. IEA는 이런 제약을 해소하지 못하면 2030년까지 건설이 계획된 세계 데이터센터 용량의 약 20%가 전력망 연결 지연을 겪을 수 있다고 봤다.
정치적 갈등도 전력망 확장의 속도를 늦춘다. 발전소와 송전선을 새로 건설하려면 환경심사와 각종 인허가를 거쳐야 하고 지역사회의 반대도 넘어야 한다. 인프라 건설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의 문제도 있다. 미국 의회에서는 송전선과 발전시설 등의 인허가를 단축하기 위한 법 개정을 수년째 논의하고 있다. 최근 여야가 합의안을 마련했지만 재생에너지와 화석연료 정책 등을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면서 표결은 중간선거 이후로 미뤄졌다.
결국 AI 경쟁의 병목이 반도체에서 전력으로 넓어질 가능성이 있다. 아무리 많은 GPU를 확보하더라도 이를 가동할 발전설비와 전기를 전달할 송전망이 없다면 데이터센터를 원하는 만큼 늘릴 수 없다.
GPU만으론 안 된다…한국도 송전망이 관건
한국도 전력 문제가 AI 산업의 새로운 제약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12월31일 발간한 'AI 시대 데이터센터 증가의 국내 에너지 소비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수요는 현재 성장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60년 약 65TWh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AI 인프라가 빠르게 늘고 고부하 연산이 본격화되는 가속 시나리오에서는 약 135TWh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정됐다. 이는 2024년 우리나라 전체 전력소비의 약 25%에 해당하는 규모다.
문제는 필요한 전기를 필요한 곳까지 보낼 수 있느냐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국내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의 핵심 문제를 발전 용량보다 수도권 송전선로 부족으로 짚었다. 데이터센터가 수도권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발전량이 충분하더라도 이를 전달할 송전망이 부족하면 AI 인프라 확대가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한국의 AI 경쟁도 GPU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만으로 결정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크다. 늘어나는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전기를 얼마나 빠르게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올트먼 CEO는 지난해 5월 8일 미 상원 상무위원회 청문회에서 "결국 AI의 비용은 에너지 비용에 수렴할 것이다. AI를 얼마나 많이 사용할 수 있을지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확보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며 "미국이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할 분야 가운데 에너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