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권 장기전세주택의 최고 보증금이 기본 총자산 기준의 2배를 웃돌면서 자격 요건과 실제 자금 조달 능력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 일정 수준 이하의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해야 신청할 수 있지만 정작 입주하려면 10억원이 넘는 목돈이 필요하다.
3일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가 지난달 낸 장기전세주택 입주자 모집공고에 따르면 래미안퍼스티지 전용면적 84㎡의 보증금은 13억884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신청자는 총자산이 기본 6억6200만원 이하여야 하지만 요구되는 보증금은 이보다 7억2640만원 많다. 보증금이 총자산의 2.1배에 달하는 셈이다. 총자산은 부동산과 금융자산, 자동차, 임차보증금 등을 합산한 뒤 금융기관 대출 등 인정되는 부채를 차감해 산정한다.
고액 보증금은 중대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용 59㎡인 청담르엘과 래미안대치팰리스는 각각 11억7000만원, 래미안퍼스티지는 10억4520만원이다.
보증금 10억원 초과 물량도 빠르게 늘고 있다. 2021년 8월 모집 당시에는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84㎡ 1개 단지·5가구뿐이었지만 지난달 장기전세Ⅰ 공고에서는 6개 단지·82가구로 확대됐다. 같은 달 별도로 모집한 장기전세Ⅱ(미리내집)에도 7개 단지·89가구의 보증금이 10억원을 상회했다. 두 공고를 합치면 10억원 초과 물량이 총 171가구에 이른다.
이번 장기전세Ⅰ의 2인 가구 월평균소득 상한은 전용 60㎡ 이하 615만9584원, 초과 879만9405원이다. 맞벌이는 각각 821만2778원과 1173만2540원까지 허용된다. 소득과 자산 기준을 모두 충족하더라도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입주할 수 없다.
장기전세Ⅰ은 계약할 때 보증금의 10%, 입주할 때 나머지 90%를 내야 한다.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84㎡ 당첨자는 계약금 1억3884만원에 이어 입주 전까지 잔금 12억4956만원을 납부해야 한다. 보증금 분할납부나 월세 전환 방식도 적용되지 않는다.
신혼부부 대상인 미리내집은 지난 4월부터 최초 보증금의 30%를 퇴거 때까지 유예하는 분할납부제를 시행하고 있다. 보증금이 13억8840만원이면 70%인 9억7188만원을 먼저 내고 유예된 4억1652만원에는 연 2.73%의 이자를 부담한다. 초기 부담을 낮췄지만 여전히 10억원에 가까운 자금이 필요하다.
대출로도 충당하기도 쉽지 않은 수준이다. 수도권 주택은 임차보증금이 7억원을 넘으면 한국주택금융공사(HF)의 일반전세자금보증 대상에서 제외된다. SGI서울보증이나 은행별 상품을 이용할 수 있지만 대출 한도와 금리는 차주의 소득과 신용도에 따라 달라진다.
공공임대마저 이른바 금수저들에게 돌아간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기전세Ⅰ의 입주 자격은 모집공고일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당시 자산 기준을 충족해 당첨되면 이후 부족한 보증금을 부모 등에게 빌려 납부하는 데 별도의 제한은 없다. 다만 2년 뒤 재계약 심사에서는 임차보증금이 자산에 포함되는 반면 개인 간 차입금은 부채로 인정되지 않는다. 부모의 도움으로 입주하더라도 재계약 때 총자산 기준을 초과할 수 있는 셈이다.
금융기관 대출만으로 10억원이 넘는 보증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만큼 현실적으로는 부모가 부족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지원할 수 있는 가구가 유리하다. 결국 부모 지원이 없는 청년·신혼부부는 보증금에 막히고 자산이 적더라도 소득이 높은 맞벌이 가구는 소득 기준에 막히는 구조다.
그렇다고 해서 보증금 수준을 단번에 낮추기도 쉽지 않다. SH는 공사채를 발행해 장기전세주택 사업 재원을 마련하고 입주자가 낸 보증금을 공사채 상환과 기존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 등에 활용한다. 보증금 책정 비율을 낮추면 입주자 부담은 줄지만 SH의 현금 유입과 공사채 상환 재원도 감소한다.
형평성 논란과 소셜믹스 취지 훼손도 부담이다. 서울시는 보증금을 일률적으로 낮추면 같은 금액으로 강남과 강북에 거주하는 이른바 로또 전세 논란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반대로 고가 보증금을 이유로 강남권 공급을 줄이면 다양한 계층이 함께 거주하는 소셜믹스 취지가 훼손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