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노동력이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이란 말은 이젠 옛 얘기다. 호주 전략정책연구소(ASPI)가 2026년 발표한 핵심 기술 추적조사(Critical Technology Tracker)를 보면 중국은 AI·로봇·에너지·첨단소재·반도체·양자 기술 등 74개 핵심 기술 중 무려 69개 부문에서 고영향 연구 기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003~2007년만 해도 미국이 64개 중 60개 부문에서 1위, 중국은 불과 3개 부문에서 1위였던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대역전이다.
특히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드론, 로봇 등에서 중국의 존재감은 급격히 커지고 있다. 무엇이 중국의 기술과 제조 경쟁력을 이처럼 빠르게 끌어올렸나. 전문가들은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중국 제조업의 속도를 꼽는다. 여기서 속도는 공장을 빨리 돌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이디어가 설계와 시제품으로 이어지고, 이를 양산해 시장에 내놓은 뒤 소비자 반응을 다시 다음 제품에 반영하는 전 생태계의 순환 속도가 빠르단 뜻이다. 예컨대 전통적인 글로벌 자동차업체가 신차 개발에 통상 3~4년 이상을 쓰는 데 비해, BYD, XPeng 등 新에너지차 업체들은 이를 18~24개월 수준까지 줄이고 있다. 제품을 싸게 만드느냐 못지않게 얼마나 빨리 만들고, 시장에서 배우고, 다시 개선하느냐가 중국 제조업의 새로운 경쟁력이란 얘기다.
이처럼 속도가 빨라진 배경은 뭔가. 첫째, 선전과 광둥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촘촘한 제조 공급망 때문이다. 전자부품과 배터리, 모터, 센서, PCB,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가까운 지역에 밀집해 있어 설계를 바꾸면 필요한 부품을 곧바로 구하고 새로운 시제품을 만들 수 있다. 둘째, 거대한 내수시장이 테스트마켓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중국 기업은 장시간 완벽한 제품을 개발하기보다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우선 시장에 내놓고 수많은 소비자의 반응과 데이터를 활용해 빠르게 개선한다.
셋째, 수직계열화와 병렬식 개발도 중요 요인이다. 핵심 부품을 자체 생산하거나 여러 부품과 제품을 동시에 개발하면서 공급업체 협의와 승인, 조달에 걸리는 시간을 대폭 줄이고 있다. 결국 중국 제조의 속도는 공급망과 시장, 기업구조가 결합해 만든 시스템 경쟁력인 셈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전기차와 드론이다. BYD는 배터리와 전기모터, 전력반도체 등 핵심 부품을 내재화하고 여러 차종을 동시에 개발하면서 개발기간과 원가를 함께 줄였다. DJI도 선전의 촘촘한 전자부품 공급망을 활용해 신제품을 빠르게 출시하고 개선하면서 세계 드론시장 선두기업으로 성장했다. 화웨이와 샤오미 등 스마트폰 업체도 비슷한 방식이며 최근에는 산업용 로봇과 휴머노이드 로봇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결국 이들 기업의 공통된 강점은 제품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 소비자 반응을 곧바로 다음 제품에 반영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속도경쟁력은 중국의 AI, 특히 피지컬 AI 경쟁력에도 핵심적 영향을 미치고 있단 분석이다. 예컨대 AI를 활용한 설계와 시뮬레이션, 디지털 트윈은 개발과 시험 기간을 줄이고 스마트공장과 산업용 로봇은 생산라인 변경을 빠르게 하며, 공장에서 축적되는 생산·불량·사용 데이터는 다시 AI의 학습자료가 되는 식이다. 한마디로 AI가 제조를 고도화하고 제조 데이터가 다시 AI를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형성된단 얘기다.
특히 자율주행과 휴머노이드 로봇 같은 피지컬 AI에서는 알고리즘만큼 실제 제품을 빠르게 만들어 현장에 투입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대규모 제조 기반을 가진 중국이 피지컬 AI 경쟁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유다. 또한 빠른 속도는 해외 진출에도 힘이 된다. 거대한 내수시장에서 제품을 빠르게 시험하고 원가와 성능을 개선한 뒤 해외로 확산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기차·배터리·태양광·드론에서 확인된 이 모델은 앞으로 로봇과 AI 하드웨어에서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속도가 항상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짧은 개발 주기는 품질·안전성 검증을 약화시킬 수 있고, 잦은 신제품 출시는 과잉투자와 가격 출혈경쟁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AI와 소프트웨어가 자동차·로봇·공장설비에 빠르게 결합할수록 제조업의 승부는 완성도뿐 아니라 학습 속도에서 갈릴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한국은 원래 '빨리빨리' 문화와 빠른 실행력, 높은 제조 역량을 갖춘 국가다.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 등 기존 강점에 AI 기반 설계와 디지털 트윈, 신속한 의사결정과 부품 협업을 결합한다면 중국 못지않은 속도경쟁력을 만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개발에 그치지 않고 좋은 기술을 얼마나 빨리 제품과 시장으로 연결하느냐다. 한국 제조업이 가진 기술력에 특유의 속도 DNA를 다시 결합할 때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