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인공지능)이 직장인의 업무를 돕는 도구를 넘어 성과급과 승진까지 좌우하는 평가 기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AI로 업무 시간을 크게 줄여도 그만큼 보상이 늘어나는 대신 높아진 생산성이 새로운 '기준선'이 되고 있다는 직장인들의 불만도 나온다.
9일(현지시간) BBC는 '승진이 직원들의 AI 활용 능력에 달려 있어야 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기업들이 직원의 AI 활용 능력을 보너스와 승진, 성과평가 등에 반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페인에서 AI 학습데이터 관련 기업의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는 던컨 트레비식(34)은 AI를 활용해 더 많은 업무를 빠르게 처리할수록 연말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적용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AI가 가져온 생산성 향상이 직원에게 온전히 돌아오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트레비식은 AI를 이용하면 일주일에 이틀치에 해당하는 업무를 줄일 수 있다면서도 "이틀을 쉬거나 임금이 40%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더 높은 생산량이 단순히 새로운 기준이 된다"고 했다. 단기적으로는 AI 활용 능력이 승진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자신의 업무 중 상당 부분이 사람 없이도 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 입증하게 된다는 게 그의 우려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액센츄어에선 AI 활용 능력이 실제 승진 요건으로 등장했다. 줄리 스위트 액센츄어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3월 팟캐스트 '래피드 리스폰스'에서 "오늘날 액센츄어에서 AI는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라며 승진을 원한다면 회사가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에 맞춰 AI를 활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밝혔다. 스위트 CEO는 AI 숙련도를 승진 요건으로 도입하면서 직원들에게 관련 도구와 교육을 먼저 제공해왔다고 설명했다.
AI 사용량을 직원별로 측정하는 회사도 등장했다. BBC에 따르면 디즈니와 메타, JP모건, KPMG 등 일부 대기업은 직원들이 대규모언어모델(LLM)과 AI 플랫폼을 얼마나 활용하는지 추적하는 이른바 'AI 리더보드'를 도입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AI 활용 자체를 인사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서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의 한 대형 컨설팅업체에서 근무하는 익명의 고위 임원은 BBC에 "AI 활용이 공식적인 의무는 아니지만 누가 보상받고 누가 뒤처지는지를 분명히 좌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직급과 경력을 갖고 있더라도 AI를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에 따라 직원 가치가 달라지는 '2단계 노동시장'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AI 사용을 수치화할 경우 실제 업무 성과보다 'AI를 많이 썼다는 기록'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헨리비즈니스스쿨의 응용 AI 연구자인 카밀라 밀러는 AI 사용을 핵심성과지표(KPI)로 만들면 직원들이 필요하지 않은 업무까지 챗봇을 거치도록 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기업은 AI 사용량을 직접 평가하는 방식에서 물러섰다. 듀오링고는 AI 사용 여부를 직원 성과평가에 반영했다가 지난 4월 이를 중단했다. 아마존도 직원들이 순위를 높이기 위해 불필요한 작업을 AI에 맡기는 사례가 나타나자 내부 AI 사용 순위표를 폐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AI 활용 능력이 직장인의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지만 단순한 '사용량'과 실제 업무 성과를 어떻게 구분할지가 기업 인사평가의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