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찰스 다윈은 광장공포증에 시달리는 바람에 오랜 세월 집밖에 나가지 못했다. 파티나 모임이 있을 땐 불안으로 격한 떨림과 구토 발작을 일으켰고 수년 간 디너파티를 모조리 포기해야했다.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겁에 질려 조산한 탓에 미숙아로 태어났다. 홉스는 나중에 “나는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며 “공포에 질려 조산했기에 불안한 기질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불안의 기질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반 고흐, 아이작 뉴턴 등 위대한 예술가와 천재들도 대부분 평온한 삶을 보내지 못했다. 신경질적이고 무언가 쫓기는 듯 불안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과거에는 ‘인지’하지 못했고, 현재는 ‘인식’할 수밖에 없는 이 ‘불안’의 정체는 무엇일까. 덴마크의 종교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1844년 ‘불안의 개념’에서 이렇게 썼다. “종교재판관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불안이 다가올 때만큼 끔찍한 고초가 닥친 기분은 아닐 것이다.(중략) 생각을 바꿔봐도, 일을 해도, 놀아도, 낮이 되고 밤이 되어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데이비드 H.발로는 ‘불안과 관련 장애’(2004)에서 “불안으로 인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심한 불안 때문에 죽음을 택할 사람은 많다”고 했다.
불안의 정의가 불분명했던 시대, 히포크라테스는 이의 원인을 체액이라고 생각했다. 담즙이 뇌로 갑자기 몰리면서 불안이 일어난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뒤를 이어 담즙의 온도에 비중을 두고 차가우면 불안이 상승한다고 여겼다.
반면 플라톤과 추종자들은 불안과 우울이 신체가 아닌 영혼의 부조화에서 온다며 자아성찰과 철학을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불안에 대한 ‘해석’은 이처럼 시대마다 각기 달랐다. 프로이트는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 문제로,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주의자들은 정신적인 병으로, 에리히 프롬과 알베르 카뮈 등 현대 사상가들은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사회구조의 한 기능으로 봤다.
이 책의 저자는 지난 8년간 3000년간 쓰인 불안 관련 글 수십만 장을 읽으며 방대한 불안의 역사와 기질, 오류와 해법에 대한 문제를 방대하게 다룬다. 스스로 불안 장애로 심한 고통을 겪은 저자는 책 제목처럼 ‘불안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탈출법까지 제시한다.
불안이라는 병명은 1980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 이미프라민의 개발로 불안은 희미한 정서에서 또렷한 장애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 때만하더라도 약물은 정신과 환자 대부분에게 ‘공통’으로 쓰였고, 전적으로 불안은 신체적 증상의 일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미국인과 프랑스인에게 잘 듣는 약이 중국인에게 별 효과를 보지 못하거나 약이 뇌를 조정해도 강한 자극에 균형이 무너지는 사례가 나오면서 불안에 대한 인식도 점점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유전적 기질이나 생리학적 원인으로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환경의 영향이나 학습으로 잉태될 수 있는 의견까지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이다.
1869년 신경쇠약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조지 밀러 비어드 의사는 “신경쇠약은 주로 도시 중상위층에서 야심이 많고 위로 올라가려는 성향의 사람에게 나타나는 미국병”이라고 주장했다. 가장 경쟁적인 자본가와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엘리트들의 병이 신경쇠약이라고 본 것이다.
이를 역사적 흐름과 연계하면 어느 정도 상통한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중세인의 삶은 체념이 지배했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조차 키울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죽음이 흔해 진짜 ‘공포’를 맛보고 사는 이들에게 불안은 일종의 ‘사치’였다.
하지만 현재는 선택의 기회가 무한대로 수렴된다. 선택의 기회만큼 불안도 커지는 셈이다. 특히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부의 불균형이 심화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오늘을 목격하면서 불안증은 역사상 유례없는 증가율을 기록했다. 1980년 자본주의와 함께 보급된 약물의 힘으로 우울증 발병률은 그 이전보다 1000배 이상 폭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불안은 그렇다면 벗어나야할 악인가.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를 단순한 동물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불안”이라며 “사람은 짐승이면서 천사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낄 수 있고, 불안이 클수록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적시했다.
적당한 정도의 불안은 사람과 동물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을 배운 셈이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책이 그 노력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펴냄. 496쪽/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