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1차대전과 2차대전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시기의 가상의 북유럽(혹은 동유럽) 국가. 화려함과 풍요의 상징이었던 산 중턱의 핑크빛 호텔은 그 안을 다양한 이야기로 채우던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풍파 속에서 스러진다. 파시즘의 광풍이 불어닥친 1960년대가 지난 후, 이 호텔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다.
2년 전 세상에 나와 아카데미부터 베를린 영화제까지 온갖 거대한 상을 휩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제작 노트가 책으로 나왔다.
새 책 '웨스 앤더슨 컬렉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이 영화의 구상 단계부터 스케치, 의상과 장소선정 등 제작과정의 모든 것을 담았다. 외형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이 어떻게 구성됐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어떤 의도인지에 대해서도 감독의 인터뷰를 통해 직접 들을 수 있다.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라는 도시의 지명이 있고, 192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있어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다 보면 철저히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비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감독 웨스 앤더슨은 이런 영화 속 분위기에 대해 "영화 속 이야기 일부는 1930년대이지만 진짜 1930년대는 아니다. 우리 영화는 현실의 시간대에 있지 않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이 아닌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역사적으로도 완전히 정확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다루려고 했던 것은 무엇보다 다른 시대의 여러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모두 모아서 중앙 유럽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사처럼 만드는 일이었다. 중앙 유럽의 히트곡 모음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화려한 산 중턱 호텔을 배경으로 하며, 홀로코스트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감독은 이 책에 담긴 인터뷰를 통해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계속 읽으며 홀로코스트가 유럽 각 국가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영화에 반영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문명이 견고하고 튼튼하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문명은 부드러운 빵이기 마련이다. 버터, 크림, 밀가루뿐 아니라 색과 공기, 솜사탕으로 만들어진다. 반은 강제적인 힘, 반은 자연스러운 전통으로 이루어진 문명은 자신감이 자랄수록 점점 더 영예로워지고 점점 더 불안정해진다. 웨스 앤더슨이 만든 허구의 중유럽 주브로브카 네벨스바드에 있는 유명한 멘들 빵집의 코르티잔 오 쇼콜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앤 워시번, 미국의 희곡 작가)
웨스 앤더슨의 작품을 챙겨보는 열성 팬이든, 이 영화를 끝이 쓸쓸한 아름다운 영화로만 기억했던 사람이든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영화 못지않게 아름다운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영화 속에 숨은 의미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웨스 앤더슨 컬렉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웨스 앤더슨 지음. 조동섭 옮김. 윌북 펴냄. 256쪽/ 2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