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국가의 빛, 2008년 가계의 빚, 그리고 2018년 기업의 빚. ‘화폐의 몰락’으로 유명한 금융전문가인 제임스 리카즈가 신간 제목을 암울한 비관적 시각으로 지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 번의 굵직한 금융 위기 이후 세계 금융 권력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경고성 발언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위기의 징후는 이전의 위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재앙으로 다가온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통화 전쟁에 이어 세계 통화 시스템 붕괴,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예견해 온 그는 세계 금융 권력이 위기를 맞을 때 자산을 동결하고 금융 시스템을 봉쇄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면 증권거래소가 폐쇄되고, 현금지급기 사용이 불가능하며 단기자금이 경색된다. 대규모 자산 동결 사태는 주변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물질인 아이스나인(소설 ‘고양이 요람’에 등장하는 용어)처럼 순식간에 발생한다.
금융 공황 상태에서 백신 역할을 해야 할 화폐 발행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경우 은행과 증권거래소를 폐쇄하는 ‘격리’ 조치가 이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12년 키프로스 은행위기와 2015년 그리스 국채위기 당시, 은행들은 모두 현금지급기 중단을 선언했다. 세계 자본시장은 1998년과 2008년 두 번의 전진(前震·큰 지진 전에 발생하는 작은 지진)을 겪었다. 당시 자본시장은 붕괴 직전에 몰렸으나 정부의 개입으로 회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는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다음 ‘지진’의 진원지가 유동성이기 때문.
2014년 10월 미국 재무부 10년 만기 중기채권 수익률이 6분 만에 16bp(베이시스포인트) 하락하고 3개월 뒤인 2015년 1월 유로 대비 스위스 프랑 환율이 20% 급등한 것이나, 2016년 6월 영국 EU 탈퇴로 미국 달러 대비 파운드 환율이 2시간 만에 12% 하락한 것은 유동성이 증발하는 과정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금융위기 징후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첫째 금 공황이다. 실물 금이 줄어들면서 주요 은행이 금을 인도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원자재 가격으로 책정돼 1온스당 1270달러에 거래되는 금은 향후 화폐 가치부여로 1만 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저자는 예측한다. 둘째는 부실채권이다. 세계에 퍼져 있는 부실채권이 부도나면 달러 유동성 위기가 나타날 수 있다.
중국의 신용위기와 디플레이션도 위기의 신호다. 무엇보다 테러나 사이버 공격, 전염병 등의 위험은 순식간에 금융 공항으로 번져나갈 수 있다.
저자는 두 번의 위기 이후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낡은 경제 이론을 고집해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반균형 이론, 합리적 기대 이론 등 전통적 모델은 시장을 움직이는 사람의 심리나 모든 요소의 복잡성을 계산하지 않는 구시대 접근법이라는 것이다.
위기의 대처법을 로마의 콜론나 가문에서 찾는 건 단순하면서도 기발하다. 저자는 900년 동안 막대한 부를 지켜온 이 가문의 세 가지 비법을 힌트로 제시한다. 콜론나 가문은 재산을 금, 미술품, 토지로 3 등분해 관리했다. 금과 미술품은 휴대성을 이유로 약탈에 늘 대비할 수 있었다. 이 비법은 디지털 시스템에서 독립돼 절대 사라지지 않는 자산으로 21세기에도 유효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비관론자의 암울한 음모론이 아니라 실제 금융권력의 음모가 진행 중”이라면서 “이 음모가 현실로 나타나면 세계 자본시장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이 멈추는 날=제임스 리카즈 지음. 서정아 옮김. 더난 펴냄. 476쪽/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