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섹스로봇 소재 식상…문제에 대한 답 이상의 질문 던져야”

배명훈 SF작가
2017.09.26 06:45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공모전] 배명훈 SF작가 심사평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던 예심이었다. 이유 있는 트렌드였지만,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기간에 똑같은 소재를 다루는 것은 꼭 좋은 선택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흔한 소재를 택했다는 점이 직접적인 감점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니고, 오랜 탐색 끝에 마침내 좋은 글을 발견해 내는 즐거움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심사 과정이었다.

다만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던 부분은 섹스 로봇 이야기가 너무 흔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특별히 역할이 있거나 내용상 꼭 필요한 장면도 아닌데, 그냥 익숙한 미래의 풍경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 로봇 이야기를 집어넣은 글이 예심 기간 읽은 응모작의 절반을 넘어섰다. 올해가 유독 심한 건지 다른 공모전에서도 원래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기성작가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1인칭 남자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섹스 로봇을 함부로 다루는 장면을 집어넣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과학소설에서는 꽤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로봇은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원칙과 “여성형 섹스 로봇”이 결합할 경우, 얼마나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게 될지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해 보시기 바란다.

본심에 오른 장편소설은 총 다섯 편이었다. '이빅션'은 전 지구적 사건에 대한 지구 곳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동시에 다루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지만, '그 사건'의 짜임새가 충분히 인상적이지 않고, 특히 그 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이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어,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집필된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러브슈프림엔터테인먼트'는 이번에 두 번째로 만나는 작품이었다. 지난번 만남 때 한 조언이 잘 반영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분적인 수정만으로는 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오래된 느낌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충분히 본심에 오를 만한 글이지만 최종적으로 선택될 만큼 인상적인 이야기가 되기는 어려운 구조라는 뜻이다. 새 이야기에 도전해 보시기를 권한다.

'영원한 빛'은 좋은 글이 될 가능성으로 가득한 글이었다. 그러나 그런 잠재력 있는 요소들이 90% 이상 100% 근처에 이르지 못하고 끝내 80%대 언저리에 머물러버린 아쉬움이 있다. 단점이 적은 글을 안정되게 쓰는 작가인 만큼 조금 더 연습하면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여지가 크리라고 믿는다. 다만, 'EL-S' 부분에 대해서는 재고해보시기를 권한다. 다른 로봇이 전부 임무가 변경되는 동안에도 유독 그 기종의 로봇만은 열악한 환경에서 그 일을 계속한 점은 대단히 아쉬운 부분이었다.

'몽이'는 과학소설 관련자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작법·독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빚어진 작품이다. 가장 많은 지지를 얻기는 어려운 글이었겠지만, 사륜이 몽이를 만나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담아낸 장면들은 어떤 작법과 독법을 거쳤든 상관없이 아름답고 놀라운 것이었다. 작가의 건필을 기원한다.

'에셔의 손'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작품이었다. 병렬적으로 나열된 것처럼 보이던 이야기가 이어지는 순간이 훌륭한 글이고, 전체적으로도 가장 뛰어난 응모작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장점이 많은 이야기이지만, 만장일치로 선정될 수 있는 글은 아니었다.

특히 소설의 앞부분에서 두드러진 현상이지만, 서술자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해서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독자까지도 숨 쉴 공간을 확보하기가 어려웠고, 인물들이 활동을 시작해서 마침내 그 숨 쉴 공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사건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동의하고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고통받고 희생되는 객체가 단지 주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재료로만 등장하는 구조의 이야기는, 과학소설 계뿐만 아니라 현재 한국 창작 계가 가장 우선적으로 경계하고 극복해야 할 원형일 것이다. SF 세계에서 여성은, 희생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이 점을 잊지 않으시기를 바란다.

단편이 돋보이는 장르답게, 본심 중단편 부문에서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나 '독립의 오단계'는 심사위원들도 잠시 토론을 하게 할 만큼 인공지능과 관련된 윤리적 법적 문제를 충격적으로 다룬 작품들이다.

'라디오 장례식'은 좋은 공기를 담고 있는 글이다. 종말 이후의 희망 없는 세계의 '드라이'한 공기지만, 꼭 긍정적이고 희망찬 공기만 좋은 공기는 아니다.

'마지막 로그'는 마지막 일주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기차 시간표처럼 가차 없이 진행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 스케줄 안에는 많은 고민이 담기게 마련인데, 그 고민과 갈등의 섬세함도 충분히 공감할 만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인물과 공간이 어떻게 제시되어야 단편의 짧은 분량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다. 사건이 펼쳐지는 공간은 연극무대처럼 좁고 한정적이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시간과 공간은 웬만한 분량의 중편소설 이상으로 깊고 거대하다.

'관내분실'은 우선 SF가 담아낼 수 있는 주제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이 작품의 강점은 쨍하게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과학소설은 주요 소재가 제기하는 문제에만 충실히 답하는 종류의 문학이 아니다. “내가 대답할 질문은 내가 던진다”는 입장은 창작자에게 허용되는 가장 중요한 특권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SF가 좋은 도구인 것은, 그런 창작자의 입장을 꺾지 않아도 될 만큼 유연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료작가로서 나는, 과학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과학소설이 제시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열심히 써내는 것에서 그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작가는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고(혹은 찾아내야만 하고), 작품을 통해 그 질문을 다른 사람들의 코앞에까지 내밀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을 거친 결과, 작가와 작품은 스스로 쨍하게 아름다워진다. 이 글, '관내분실'처럼.

그렇기 때문에 수상자의 성취는 심사위원의 것이 아닌 수상자 본인의 것이 된다. 그 일을 해낸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보낸다. 아울러 수상의 영광을 나누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도 위로와 격려와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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