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판’은 음반 판권 소유자와 라이선스(사용권) 계약 없이 불법으로 제작해 유통시킨 ‘해적 음반’을 말한다. 국외 음악과 음반 계약하는 수가 적어 음반 수입이 전혀 없었던 1960년대 지상파 라디오에서도 빽판을 이용했고 방송금지곡들은 빽판을 통해 음지에서 몰래 유통됐다.
책은 저자가 2018년 청계천 박물관에서 진행한 ‘빽판의 시대’ 전시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시대별로 국내에서 각광받았던 빽판의 역사를 통해 팝송과 아티스트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또 저자가 직접 촬영한 4000여 컷의 사진 자료와 빽판이 시작된 1950년대부터 LP 시대를 마감한 1990년대까지 흥미로운 음악 이야기가 담겼다.
빽판의 시대는 1958년이 그 시작이다. 한국 전쟁으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자, 해적 유성기음반과 LP가 부유층과 일부 중산층을 중심으로 향유됐다. 클래식부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장르 음악이 한국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초창기 빽판들은 춤바람 난 50년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댄스용 연주 음반이 많은 인기를 얻었다. 여기에 국내 개봉한 외국 영화 주제가와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카 등 해외 팝 가수들의 노래가 빽판을 통해 소개되면서 팝 애호가들도 생성되기 시작했다.
빽판은 특히 방송 음악 프로그램과 음악감상실, 다방 등에서 인기를 누리며 규모를 키웠다. 트로트 일변도의 한국 대중음악이 다양성이라는 자양분을 받게 된 데에는 ‘불법의 은밀한 유혹’이 키운 역설의 성장이 있었던 셈이다.
LP 제작이 본격화한 1960년대 빽판 시장은 강력한 영향력과 지분을 확보했다. 당시 한국음반제작자협회에 등록된 레이블 47개와 무허가업체 60여개 등 100개가 넘는 음반사가 한 달에 평균 150여 종류의 빽판을 제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런 음반에 정부의 정식 납세필증 인지와 지방자치단체의 검인 인지를 붙여 판매했다는 사실이다.
70년대 들어 빽판은 국내 음반 시장의 60%를 점령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이에 정부는 ‘건전가요제정 및 선전 보급을 위한 개창 운동사업’을 발표하며 단속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음반법은 되레 빽판의 전성시대를 불러왔다. 근절은 고사하고 제작사 표기도 없이 조악하게 제작된 빽판들은 라이선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저렴한 가격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수 Alice cooper는 ‘앨리스 쿠퍼’가 아닌 ‘알리스 퍼쿠’로 표기되거나 ‘HELP’를 ‘HELF’로 적는 오타가 수두룩했다.
저자는 “빽판은 불법이지만 대중음악의 자양분 역할과 팝의 국내 보급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존재 가치를 읽을 수 있다”며 “빽판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겐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고, 팝송을 한글가사로 적어놓고 부른 세대에겐 추억을 소환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빽판의 전성시대=최규성 지음. 태림스코어 펴냄. 560쪽/4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