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죽었다, 아베는 사퇴하라'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자 일본 국민들은 이렇게 외쳤다. 도심을 가득 메운 그들의 외침은 강렬했다. 일본 국민의 반대와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베는 일본을 전쟁 국가로 다시 만들었다. 아베가 이끄는 일본 자민당은 지난 19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 등의 내용이 담긴 11개 안보 관련 법률 제·개정안을 강행 처리했다.
기자는 아베의 입법 강행 처리 과정을 일본 현지에서 직접 목격했다. '잃어버린 20년 일본, 부활의 현장을 가다' 기획 취재 차 일본을 찾은 지난 15일. 그동안 일본인들 조차 상상하지 못했다던 대규모 시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1960년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반대한 '안보투쟁' 이후 50년만이라고 한다.
안보법안 반대 시위를 취재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을 찾아가는 길, 흰 바탕에 빨간 글씨로 쓰여진 플랜카드가 눈에 확 들어왔다. '경기회복, 이 길 밖에 없다' 집권당인 자민당 당사 건물 앞에 붙어 있는 문구다. 그로부터 좀 더 걸어가자 '자유와 생명은 우리들의 것이다', '사람을 죽이지 말고 땅과 함께 살자'는 플랜카드가 여기저기서 나부꼈다. 일본 국민들과 민간단체들이 직접 쓴 것이다.
국회의사당 맞은편 헌정기념관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일본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노인들은 뙤약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함께 손을 잡고 나섰다. 직장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삼삼오오 모였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아베는 물러나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엄마와 함께 길거리 바닥에 앉아 목청을 높이는 7살 소년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니키마티 유(7)군은 "위험한 전쟁에 나가서 죽기 싫다"고 소리를 높였다. 어린 소년들부터 70~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민들은 평화를 위협하는 '안보 법안'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인도카레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나카지마 미츠오(67)씨는 "전쟁 끝난지 70년 밖에 안 됐다"며 "우리 세대를 위한 게 아니라 미래,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아베 정권은 계속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며 "안보법 통과로 결국 빈곤층이 돈과 목숨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2012년 말 2차 아베 내각이 들어섰을때만 해도 아베는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다했다. '잃어버린 20년'을 찾겠다는 게 목표였다. '아베노믹스' 세 가지 화살을 힘차게 쏘아 올렸다. 금융완화, 재정확대, 성장전략으로 일본 경제는 서서히 살아났다. 각종 경제지표가 말해줬다.
기업들 실적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주가(닛케이지수)도 2배나 올랐다. 무엇보다 20년 넘게 일본 경제를 따라다녔던 디플레이션을 극복했다. 물가는 플러스로 전환됐고 사상 최대 실적을 내고 있는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신규 채용을 늘렸다. '아베노믹스'는 정권의 지지율을 높이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머니투데이 6월18일자 1면 참조- [창간기획]'잃어버린 20년' 일본, 부활의 현장을 가다
이 기세를 몰아 지난해 말 중의원 선거에서 연립 여당이 3분의 2가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완승했다. 내년 여름 참의원 선거 때까지 큰 선거가 없는 이 시점에, 아베는 '안보법안' 처리에 집중했다. 일본에선 이 법안을 아베의 '네 번째 화살'이라고 부른다.
아베가 '네번째 화살'에 집중하자 경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3%(전분기대비)로 3분기만에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일본 경제의 60%를 차지하는 개인 소비와 수출 역시 크게 줄었다. 소비는 전분기대비 0.7% 감소하며 4분기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수출도 전분기대비 4.4% 감소했다.
무코야마 히데히코 일본종합연구소 상석주임연구원은 "최근 일본 경제를 생각하면 국민의 입장에서는 아베가 경제에 더 많은 힘을 쏟아 붓기를 바랄 것이다"며 "그런데 정부는 다른 곳에 눈을 돌렸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민의 반대에도 국회에서 안보 입법을 강행하는 건 정부가 도박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그의 지적대로 아베 정권에 대한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안보법안 통과 후 정권 지지율은 급락했다. 교도통신이 19~20일 이틀간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내각 지지율은 38.9%로 떨어졌다. 같은 시기 요미우리 신문과 니혼게이자이신문 조사에서도 아베 지지율은 각 41%, 40%였다. 한 달만에 4~6%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지난 5월만해도 아베의 지지율은 51%대였다.
최근 중국발 쇼크 영향이 컸지만 2만포인트를 넘어섰던 닛케이 평균 주가는 1만8000선으로 떨어졌다. 오는 2017년까지 소비 세율을 10%까지 올리는 변수까지 더하면 아베노믹스의 앞 길이 순탄해 보이지 않는다.
위기감을 느낀 아베는 일단 소비세 인상 시 소비자 부담을 완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 협상에 주력하면서 민심을 추스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다시 경제 중심의 전략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장상수 일본 아시아대학교 특임교수는 "아베 정권은 경제 재건이라는 희망 아래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면서 "안보법 개정 등의 문제가 전면으로 부각되면 경제 정책 추진의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