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리카르도와 한영FTA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2025.12.24 05:27
여한구 산업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시작해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을 선도해 왔던 영국도 나폴레옹 전쟁을 겪고 19세기초에 보호무역 조치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유럽으로부터 수입되는 값싼 곡물을 막고자 했던 '곡물법'이 대표적이었다. 데이비드 리카르도는 이로 인한 물가상승은 경제성장과 경쟁력을 약화시키므로 영국은 강점이 있는 제조물품을 수출하고 값싼 농산물을 수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자유무역의 이론적 기반이 된 "비교우위론"이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세계 경제의 패권국이었던 영국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몇가지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 1846년에 '곡물법'을 폐지했고 1849년에는 당시 200년간 고수해 온 자국 선박의 이익만을 대변하던 '항해법'을 전격 폐지했다. 보호무역의 빗장을 스스로 푼 이 결단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자유무역의 황금기를 여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170여 년이 흐른 지금, 전 세계는 다시 보호무역주의의 노도(怒濤)와 공급망 재편이라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전환기에 자유무역으로 세계 10위권 경제를 건설한 대한민국과 영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다시 손을 맞잡았다. 지난 6월 캐나다 G7 정상회의 당시 양국 정상께서 연내 타결을 추진하도록 지시하신 후 12월 15일 런던에서 '한-영 FTA 개선 협상'이 최종 타결됐다.

영국은 유럽 내 주요 교역·투자국이자 AI와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다. 최근 영국의 세계적 반도체 설계 기업인 'ARM'이 한국 대학들과 'ARM 스쿨' 설립에 합의하고 영국 기업이 한국 해상풍력에 투자하는 한편 한국 기업은 영국에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용 하부구조물 공장을 건설하는 등 탄소중립과 에너지전환의 파트너이다.

개정된 한-영 FTA에서는 제조업에 강점이 있는 한국과 지식서비스·디지털 분야 강국인 영국의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상호보완적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기업 친화적인 원산지 기준을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K-푸드, K-뷰티 등 주요 품목에서 원산지 문턱을 낮췄고, 부산항을 출발해 로테르담 등을 거쳐 영국으로 수출되는 물량도 특혜 관세를 적용받을 수 있도록 해 우리 기업의 애로를 해소했다.

문화 콘텐츠 분야의 진전도 있었다. 영국이 체결한 양자 FTA 최초로 웹툰과 온라인 게임 등 시청각 서비스를 개방하며 K-콘텐츠의 영토를 넓혔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시청각 공동제작 협정' 추진이다. <해리 포터>, <노팅힐>, <007 시리즈> 등 전 세계를 매료시킨 영국과 한국의 스토리텔링 역량과 제작 기술이 결합한다면 글로벌 시장을 뒤흔들 블록버스터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타결은 자유무역의 위기하에 한국과 영국 같은 '미들파워(Middle Power)' 국가들이 연대해 자유무역을 수호하는 글로벌 리더로 나섰다는 데 그 의미가 깊다. 새해에도 우리는 동남아, 서남아, 중남미, 아프리카 등 글로벌사우스로 디지털·자유무역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수출 다변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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