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새벽, 농가에서 출하된 돼지들은 전국 도축장으로 향한다. 이 가운데 도매시장 경매에 참여하는 물량은 거래가 이뤄지는 도매시장까지 이동해야 한다.
축산 유통은 '물건이 있는 곳에서 거래가 이뤄진다'는 상식 위에서 수십 년간 움직여 왔다. 하지만 이제 그 익숙한 풍경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돼지는 더 이상 경매장에 가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가 찍은 고화질 영상과 객관적인 품질 데이터가 모니터 속으로 들어오고, 중도매인들은 전국 어디에서든 화면을 보며 가격을 부른다. 축산물 유통이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디지털 시대'로 본격 진입하고 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은 기존 축산물 도매시장의 비효율성을 개선하고 새로운 경매 운영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원격지 상장 등 '상물분리형 온라인 경매' 도입을 확대하고 있다고 14일 밝혔다.
그동안 국내 축산물 경매는 실물과 거래가 함께 움직이는 '상물(商物)일치형' 구조였다. 살아있는 가축이나 도축된 지육을 반드시 도매시장으로 이동시킨 뒤 현장에서 경매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장거리 운송에 따른 물류비는 계속 늘었고, 이동 과정에서 육질 저하가 발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아프리카돼지열병(ASF)과 같은 가축전염병이 발생하면 이동 제한으로 거래 자체가 흔들리는 구조적 한계도 안고 있었다.
시장 기능도 점차 약해지고 있다. 국내 돼지의 도매시장 경매 비율은 2016년 9.2%에서 지난해 4.4%까지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새로운 거래 방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이 제시한 해법은 '실물은 현장에 두고, 거래는 온라인으로 하자는 것'이다.
도축장에서 촬영한 고화질 사진과 실시간 영상이 경매 시스템으로 전송되고, 육질과 등급 등을 분석하는 KBM(인공지능 및 딥러닝 기반의 소 품질평가 장비)과 VCS2000(인공지능 및 영상 분석 기반의 돼지 품질평가 장비) 등 품질평가 장비가 생산한 객관적인 데이터가 함께 제공된다.
중도매인은 굳이 경매장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모니터 화면을 통해 품질을 확인하고 가격을 결정할 수 있다. 현장에 있는 것은 돼지가 아니라 '데이터'와 '영상'이다.
달라지는 것은 거래 방식만이 아니다.
원격지 경매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면 도축장에서 도매시장까지 지육을 별도로 운송하는 비용과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실제 비용 절감 규모와 구매자 참여 확대, 가격 형성 효과는 향후 거래 실적을 통해 검증해야 하는 부분이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은 고령층 중도매인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화면 구성을 단순화하고, 실시간 생중계 영상과 화상통신 기능을 추가해 현장감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도축장에서는 기존의 무겁고 복잡한 촬영 장비 대신 스마트폰 기반 촬영 시스템을 도입 중이다. 경매가 끝난 뒤 종이로 출력하던 낙찰확인서는 스마트폰 알림톡으로 자동 발송하도록 바뀐다. 축산 유통의 디지털 전환이 거래부터 행정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온라인 경매 인프라도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은 농협 나주를 시작으로 협신식품, 도드람 안성, 부경축공, 제주축공 등에 온라인 경매 기반을 구축했다. 현재 지역 간 거래할 수 있는 원격지 경매는 초기 단계로, 축평원은 삼세-창녕축공 원격지 경매를 통해 해당 거래모델의 운영 가능성을 먼저 확인하고 단계적으로 확산해 나갈 예정이다.
삼세 도축장에서 촬영한 사진과 생중계 영상이 창녕축공으로 실시간 전송되면 중도매인들은 온라인으로 경매에 참여한다. 낙찰된 돼지는 창녕을 거치지 않고 영천 현장에서 곧바로 원물 또는 포장육으로 가공돼 구매자에게 공급된다.
기존에 여러 차례 거쳐야 했던 물류 단계가 크게 줄어드는 것이다.
축산물품질평가원은 그동안 경기권에 국한됐던 소 부분육 온라인 경매도 영남권과 충청권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박수진 원장은 "온라인 경매는 물류 부담을 줄이고 거래 편의성을 높이는 축산물 유통 혁신의 핵심 사업"이라며 "생산자와 유통업계 모두가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플랫폼 운영과 시스템 개선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