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출로 늘어난 소득이 투자와 임금, 소비로 얼마나 확산하느냐가 하반기 한국 경제의 성장세를 좌우할 전망이다. 소득이 내수 전반으로 확산하면 수출과 소비가 맞물리는 선순환이 가능하지만 반도체 기업과 자산 보유층에 집중되면 체감경기 개선 없이 산업·계층 간 양극화만 심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5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실질 국내총소득(GDI)은 전년 동기 대비 15.6% 증가했다.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3.7%의 4.2배다. 두 지표 간 격차는 11.9%포인트로 1960년 통계 작성 이후 가장 컸다.
반도체 수출가격이 원유 등 수입가격보다 큰 폭으로 오르면서 교역조건이 개선된 결과다. 같은 물량을 생산하고도 해외에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국내 경제 전체의 실질 구매력이 커졌다.
정부와 해외 주요 투자은행(IB)들도 반도체 호황과 내수 파급효과를 근거로 하반기 성장 흐름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상반기 높은 성장에 따른 기저효과로 성장률은 둔화하겠지만 수출과 투자, 소비가 함께 버티면서 연간 3%대 성장은 무난할 것이란 전망이다.
씨티은행은 올해와 내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각각 3.7%, 3.0%로 전망했다. 특히 반도체 수출과 소득 증가의 내수 파급효과, 기술 분야 설비투자 등을 근거로 올해 3·4분기 성장률이 전기 대비 평균 0.7%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다.
김진욱 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반도체 수출가격의 강한 상승세가 하반기에도 이어지면서 교역조건과 GDP 디플레이터, 명목 GDP를 끌어올릴 것"이라며 "올해 명목 GDP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15.5%에서 20.7%로 상향했다"고 밝혔다. 명목 GDP 성장률 전망치는 1991년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JP모건도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올해 3.8%, 내년 3.3%로 종전보다 각각 0.1%포인트, 0.6%포인트 상향했다. 정부는 올해 성장률 3% 달성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늘어난 소득이 투자로 이어지는 움직임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2분기 설비투자는 반도체 제조용 기계 등을 중심으로 전기 대비 0.2% 증가했다. 연구개발과 소프트웨어 등이 포함된 지식재산생산물투자는 3.3% 늘어 2012년 1분기 이후 14년 3개월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소비심리도 회복되는 모양새다. 지난 4월 99.2까지 떨어졌던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5월 106.1로 반등한 데 이어 두 달 연속 오름세를 이어갔다. 지수가 100보다 높으면 장기 평균보다 소비심리가 낙관적이라는 의미다.
민간소비는 가전제품 등 재화와 음식·숙박 등 서비스 소비가 함께 늘면서 0.4% 증가했다. 2분기 GDP 성장률 0.6% 가운데 내수와 순수출은 각각 0.3%포인트씩 기여했다. 1분기에는 성장률 1.8% 가운데 순수출이 1.1%포인트, 내수가 0.7%포인트를 담당해 수출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컸다.
김유미 키움증권 연구원은 "상반기에는 반도체 수출과 인공지능(AI) 투자 확대가 생산 증가를 견인했다면 하반기에는 교역조건 개선으로 늘어난 소득이 민간소비로 얼마나 확산하는지가 경기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도체 등 IT 업종의 이익 증가가 투자와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자산효과까지 더해지면 하반기 소비를 지지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여전히 변수는 남아있다. AI 투자 사이클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지 못하는 내수업종은 수요와 고용·소득 회복이 상대적으로 더디다. 소득의 낙수효과가 제한되면 높은 성장률에도 투자와 소비의 저변이 넓어지지 않아 하반기 성장의 지속 가능성이 약해질 수 있다.
반도체로 늘어난 소득이 내수로 확산하지 못할 가능성은 금융지표에서도 확인된다. 3분기 중소기업 대출수요지수는 22에서 25로 주요 차주 가운데 유일하게 상승했다. 반면 대기업 대출수요지수는 11에서 6으로 낮아졌다. 수출 대기업은 이익 증가로 외부자금 수요가 줄었지만 중소기업은 운영자금과 기존 대출 상환을 위해 더 많은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반도체 호황으로 수출 대기업의 이익이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중소기업과 취약가계 등 약한 고리의 신용위험은 커지는 'K자형 경기'가 나타나고 있다"며 "대기업과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중소기업과 주택담보대출 이외 가계대출의 연체율은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상장기업 영업이익 상위 10개사의 이익 비중이 급증하는 시기와 중소기업 신용위험지수가 크게 상승하는 시기가 밀접하게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낙수효과 제한으로 인한 중소기업의 수익성 악화는 경기 확장기에도 금융기관의 신용위험 우려를 키워 외부자금 조달 통로를 좁히고 부도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