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짓는 산업이었다. 비가 언제 내릴지, 병해충이 어디에서 번질지, 올해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를 농업인의 경험과 현장조사에 의존해 판단했다.
이제 농업의 시선은 우주로 향한다. 농림위성이 농경지를 내려다보며 작물의 생육과 농지 변화를 살피고, 인공지능(AI)은 병해충을 진단하고 비료 사용량을 추천한다. 연구자는 AI와 함께 연구과제를 설계하고, 농업인은 스마트폰으로 필요한 기술을 묻는다.
AI가 농사를 돕고 위성이 작황을 읽는 시대. 대한민국 농업의 전환점 한가운데 이승돈 농촌진흥청장이 있다.
18일 취임 1주년을 맞는 이 청장은 지난 1년을 농업 R&D 혁신의 밑그림을 그린 '설계의 시간'으로 돌아봤다.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그의 시선은 새로운 청사진보다 지난 1년간 시작한 일들을 제대로 완성하는 데 있다.
이 청장은 "1년 동안 계획을 세웠는데 2년 차가 됐다고 또 새로운 계획을 만들면 늘 계획만 세우는 조직이 된다"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문제가 있다면 고치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과제를 시작하는 것만큼 이미 내놓은 기술이 현장에 뿌리내렸는지를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농진청에서 성과로 내세웠던 연구기술들이 5년 뒤에도 농업인의 손에 남아 있는지를 다시 보겠다는 것이다. 연구개발의 성패를 논문이나 특허가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 '농업 현장에 무엇을 남겼는지'로 평가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 청장은 취임 이후 1년 동안 102차례 농업 현장을 찾았다. 농업인·학계·산업계가 참여하는 'K-농업과학기술협의체'를 출범시켰고, 지난해 11월에는 연구와 기술보급, 행정 전반을 AI 중심으로 전환하는 '농업과학기술 인공지능 융합 전략'도 발표했다. 최근에는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도 배석하며 농업 R&D의 국가 전략적 역할을 넓히고 있다.
그가 그리는 미래 농업의 중심에는 AI가 있다. 대표 서비스가 농업인을 위한 'AI 이삭이'다. 농진청이 보유한 공식 농업기술 자료를 기반으로 농업인의 질문에 답하며, 오는 9월 선보이는 'AI 이삭이 2.0'에는 병해충 진단과 비료 사용량 추천, 음성 영농일지 기능 등이 추가된다.
현재 이삭이에는 농업기술 문서 1만5000여권과 36만페이지의 자료, 병해충 이미지와 농가소득 데이터가 등록돼 있다. 그러나 이 청장이 정작 중요하게 보는 것은 기술 수준보다 농업인의 반응이다.
그는 "AI 이삭이가 나왔을 때 농업인들로부터 '이거 정말 괜찮네'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며 "만약 '뭐 또 하나 만들었네'라는 시큰둥한 반응에 그친다면 실패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 농업인이 실제 얼마나 잘 쓰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는 얘기다.
농업인을 위한 AI가 이삭이라면 연구자를 돕는 AI는 '새싹이'다. 새싹이의 '동료과학자' 기능에는 농진청이 20년 동안 축적한 연구계획서와 보고서 3만건이 담겼다. 농진청은 이를 연구기획에 우선 적용한 뒤 연구·기술보급·행정 전반으로 확대해 연구개발부터 현장 보급까지 걸리는 시간을 30% 이상 줄일 계획이다.
AI 구상은 'K-농업 문샷 프로젝트'로 확장된다. AI·로봇 기반 농작업 90% 무인·자율화, AI 병해충 진단을 통한 농약 사용 50% 절감, AI·데이터 육종을 활용한 신품종 개발기간 10년에서 3년으로 단축 등이 목표다.
지난 7월 발사된 국내 최초 농림위성은 데이터 농정의 또 다른 축이다. 120㎞의 촬영폭과 5m급 공간해상도로 3일 주기로 전국을 관측해 작물 재배면적과 생육, 농지 변화, 재해 피해를 파악한다.
그에게 농림위성 발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위성에서 확보한 정보를 농산물 수급과 재해 대응, 농가 영농에 실제 활용해야 비로소 사업이 완성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철학은 인사에도 이어졌다. 홍석영 농림위성센터장은 1990년대 초 연구직에 들어온 뒤 30년 넘게 원격탐사 분야를 연구한 전문가다. 더 높은 보직으로 갈 역량을 갖췄지만 이 청장은 오랜 연구 노하우를 농림위성의 실제 활용으로 완성될 수 있도록 역할을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한 연구자의 30여년 연구가 대한민국 첫 농림위성의 현장 활용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된 배경이다.
이 청장은 "농림위성 발사의 진정한 성공은 위성을 우주에 올리는 데 있지 않다"며 "위성정보를 농산물 수급 안정과 재해 대응, 농가 영농관리에 활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AI와 위성이 하나로 연결되는 농장도 그리고 있다. 농업인이 필지를 등록하면 AI가 토양과 위성 생육 정보를 분석하고, 병해충 위험이 나타나면 먼저 알려주는 방식이다. 농업인이 현장에 없더라도 스마트폰으로 논과 밭 상태를 확인하는 시대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몽골 방문을 수행했을 때도 연구자 출신인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현지 농업으로 향했다. 광활한 초원과 풍부한 가축 자원을 갖고 있지만 낮은 생산성과 열악한 사료 여건으로 어려움을 겪는 몽골 축산업의 현실을 눈여겨봤다.
농진청이 현지에 보급한 발효사료와 사일리지, 가축 개량 기술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모습도 확인했다.
그에게 농업기술의 가치는 연구실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기술이 현장을 얼마나 바꾸고, 농업인의 삶을 얼마나 나아지게 하느냐가 연구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이다.
지역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도 같은 맥락이다. 농진청은 전국 9개 도의 여건과 시장성, 연구기반을 고려해 69개 지역특화작목을 선정하고 품종 개발부터 재배기술, 가공·유통과 산업화를 지원하고 있다. 지역특화작목 생산액은 2020년 7조8000억원에서 2024년 10조6000억원으로 35% 늘었다.
첨단기술 못지않게 그가 강조하는 단어는 '현장'이다. 농업·농촌의 건의사항을 통합 관리하는 '현장ON'을 만들어 올해 7월까지 접수된 3109건 가운데 2469건을 연구와 사업, 제도 개선 등에 반영했다.
연구 성과의 평가 방식도 바꾸려 한다. 논문과 특허가 몇 건 나왔느냐보다 기술을 도입한 농가의 생산비가 얼마나 줄고, 소득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AI 기반 경영 컨설팅을 받은 농가의 소득은 10a당 평균 162만원, 25.9% 증가했다.
이 청장은 "농진청에서 개발한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농업인이 사용하지 않거나,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과가 아니다"며 "연구의 마지막 평가는 보고서가 아니라 농가의 경영장부와 통장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7년 만의 농진청 내부 출신 청장인 그는 취임 후 '실용성·소통·협업'을 조직 운영 원칙으로 내세웠다. 불필요한 의전과 행정 절차를 과감히 줄였고, 지난 1년간 11차례에 걸쳐 453명의 직원과 직접 대화했다.
취임 첫해 AI를 심고 위성을 띄우며 농업 R&D의 새로운 판을 짰다면, 이제는 그 변화가 현장에서 성과로 이어지는지를 증명할 차례다.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드는 것보다 지금 시작한 일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연구자 이승돈의 시선은 여전히 미래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취임 2년 차 그가 꺼내든 화두는 '완성'이다. 새로운 미래를 또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약속한 미래를 농업 현장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이승돈 농진청장은 "농업은 기후위기와 고령화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산업이지만 AI와 로봇, 바이오, 우주기술을 가장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 산업이기도 하다"며 "대한민국 농업의 미래를 먼저 연구하고, 그 미래가 농업인의 삶에서 현실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