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참 되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은 어르신들에게 인생에 대해 물어보면 자주 듣는 대답이다. 그렇다. 인생은 위기와 시험의 연속이다. 이제 좀 안정된 것 같으면 위기가 찾아오고 해결을 어느 정도 한 것 같으면 또 다른 시험이 다가온다. 위기가 한 번에 오면 그래도 다행. 하나 정도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텐데 위기는 늘 어깨동무하고 쌍으로 찾아올 때가 많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일. 언젠가 좋은 날이 찾아올 걸로 믿고 꿋꿋이 하루하루를 살아낼밖에. 그러다 보면 가수 송대관이 노래한 대로 “쨍하고 해뜰 날”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영화 ‘보고타’의 주인공 국희(송중기)의 인생도 참으로 힙겹기 그지 없다. 나라가 부도난 IMF 때 이역의 땅 콜롬비아로 가족과 함께 이민 간 국희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다. 도착하자마자 전 재산이 든 가방을 도둑맞고 큰소리치고 가족을 이끌고간 아버지(김종수)가 주저앉아 대신 가장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게 된다. 그러나 밑바닥 삶은 열심히, 성실히만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게 이 바닥의 룰. 그는 보고타의 한인 이민자 의류상권의 1인자인 아버지의 지인 박병장(권해효)의 권유로 속옷 밀수사업에 뛰어들게 된다. 심부름꾼으로 시작한 처음엔 대단한 꿈이 있었던 게 아니다.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1구역에서 부촌인 6구역으로 이사하는 것만 바랐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어둠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다 보니 배신과 시기, 음모가 뒤섞이고. 우직하게 직진하던 소년 국희의 삶은 1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둠의 왕’ 자리에 다다르게 된다.
영화 ‘보고타’는 일단 꿈많던 소년이 이역의 땅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어둠의 왕으로 등극한다는 짧은 로그라인만으로 궁금증을 고조시킨다. 게다가 ‘태양의 후예’ ‘재벌집 막내아들’ ‘빈센조’로 안방극장을 제패한 송중기가 삶과 죽음이 수시로 오가는 밀수판에서 권력자가 돼가는 과정을 연기한다는 점도 호기심과 기대감을 끌어올린다. 여기에 최근 충무로에서 가장 주가가 높은 이희준 권해효 김종수 조현철 등 연기파 배우들이 가세했으니 더욱 구미가 당길밖에. 더군다나 2015년 데뷔작 ‘소수의견’으로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호평을 받은 김성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완성된 영화는 분명히 호불호가 나뉠 수 있다. 하루하루 삶이 힘겹기만 한 2024년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20년 전 이역의 땅에서 '어둠의 왕' 자리에 올라간 한 남자의 일대기가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엄청난 권력과 부를 지닌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동네 상권 회장님 수준이니 아찔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엔 부족함이 많다. 정재계를 휘두르는 중남미의 엄청난 권력가를 상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다소 애매한 설정값을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는 건 역시 송중기다. 송중기가 또다시 그 어려운 불가능해보이는 미션을 성공시킨다. 20대 초반 솜털이 보송보송한 소년이 어둠의 세력에 발을 디뎌 결국 최고 권력자가 돼가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들뜨지 않게 꾹꾹 눌러 담으면서 선굵게 그려낸다. 큰 욕망을 좇은 게 아닌 온 가족이 윤택하게, 주위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꿨던 소년이 인생이 이끄는 대로 따르다보니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 쓸쓸함, 아련함을 섬세하게 형상화해낸다. 송중기란 배우의 저력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송중기와 극중에서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호흡하는 충무로 최고 실력파 배우들의 연기 하모니도 스크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초반에는 국희의 조력자였다가 관계가 틀어진 수영을 연기한 이희준은 또다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한다. 복잡다단한 감정을 자유롭게 오가며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연기력을 과시한다. 음흉하고 의뭉스러운 박병장을 완벽하게 형상화낸 권해효의 연기도 압권이다. 박지환, 조현철 등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120% 해낸다.
‘보고타’를 보다보면 지난한 국희의 인생만큼 어려웠던 영화의 운명이 느껴진다.. 콜롬비아 보고타로 현지 촬영을 떠났다가 코로나로 인해 촬영을 중단하고 1년 후 한국에서 재촬영을 시작해 어렵게 어렵게 영화를 완성한 과정을 눈썰미가 좋은 관객이라면 눈치챌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 빈구석이 보이고 흐름이 끊기는 부분이 있다. 티가 크게 나지는 않지만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럴 때마다 송중기가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송중기의 팬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또한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중장년 이상의 관객들에게는 야생의 정글같았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주며 남다른 여운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