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이김과 짐. 승자와 패자. 영광과 좌절. 김형주 감독의 영화 '승부'는 검은 돌과 흰 돌처럼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명확한 바둑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거기엔 변화무쌍한 내면의 풍경이 존재한다. 가로 19줄과 세로 19줄이 만들어내는 무궁무진한 수의 소우주처럼, 이 영화는 관객들을 몰입 시키고 한 세대 전의 대국장으로 이끌고 가며, 그곳에서 주인공들이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을 체험시킨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지만 한국 바둑 역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라이벌 대결을 펼쳤던 조훈현과 이창호. 그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승부'는 바둑에 관심 있는 사람은 물론, 바둑을 전혀 모르더라도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문외한에게도 이 영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승부'는 흑백의 돌로 다투는 대국 자체가 아닌, 그 돌을 쥐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승부'는 ‘조훈현 vs 이창호’의 시절을 살았던 장년층 관객에게 묘한 감흥을 준다. 바둑이 지금보다 훨씬 더 대중적이었던 시절, 그들이 벌이는 ‘승부’는 국민적 관심사였고, 그들이 중국과 일본을 평정하던 성과는 올림픽 금메달만큼 국민적 쾌거였다. 세월은 흘러 바둑이 예전의 인기를 잃어버린 지금, '승부'는 영화적 소재로 부적절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국을 스크린으로 불러온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는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 영화의 제작자이자 감독과 함께 시나리오를 쓴 윤종빈 감독의 서사적 패턴이기도 하다. '범죄와의 전쟁'(2012)와 '공작'(2018)과 시리즈 '수리남'(2022)에서 그랬듯, '승부'는 과거의 인상적인 그 무엇을 모티프로 삼아 그 뒤에 존재했던 인간들의 드라마를 보여준다. 거기엔 욕망, 생존, 신뢰, 배신, 좌절, 복수, 슬픔, 고통 등 인간의 원초적이면서도 절박한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실화를 소재로 한 윤종빈의 서사는, 그럼으로써 역사적 기록에서 빠져나와 동시대의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
여기서 '승부'는 단순한 바둑 대국 이야기를 넘어, 챔피언과 도전자의 위치가 바뀌는 과정을 박진감 있게 보여준다. 어린 이창호를 집에 들여 아들처럼 키우는 조훈현(이병헌). 제자(유아인)는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 하고, 스승은 기초와 정석을 강조한다.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제자는 껍질을 벗고 어느새 스승을 능가해 버리고, 현실의 패배 앞에서 스승은 흔들린다. ‘청출어람’의 흐뭇한 미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승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 내면을 드러낸다. 조훈현에게 그것은 질투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고, 패배의 좌절도 아니며,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이다. 이창호에게 그것은 미안함도 아니고, 자책도 아니고, 승리의 쾌감도 아니며,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합한 것이다. 승부는 단순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둘러싼 ‘감정의 세계’는 영화 내내 휘몰아친다.
여기서 '승부'는 편집, 촬영, 음악, 미술 등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 뛰어난 조율을 보여주며 영화가 지닌 아우라는 관객에게 최대치로 전달하는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이병헌과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있다. 그들은 실제 인물과의 싱크로율 높이는 것을 넘어, 시나리오나 감독의 연출이 담아내지 못하는 캐릭터의 뉘앙스를 미묘하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한다. 실화 기반의 영화에서 배우가 실제 인물과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 인물의 내면을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스크린에 투영하는 것이다. 사제 관계를 넘어 유사 부자 관계이자 적대 관계였던 조훈현-이창호가 된 이병헌-유아인은 표면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그 아래에선 뜨겁게 주고 받는 ‘정중동’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승부'는 조훈현의 입장에선 제자에게 빼앗겼던 정상의 위치를 천신만고 끝에 되찾아오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이창호의 입장에선 스승을 넘어 자신만의 바둑을 두기 위해 노력하는 천재 기사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관객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바둑 한 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인간의 드라마일 것이다. 반칙과 불법이 성공의 지름길처럼 여겨지는 세상에서, 이 영화가 지닌 페어 플레이 정신과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상식적이면서도 숭고하다. 최근 한국영화 중에 이러한 가치를 이야기했던 작품이 있었던가. 그런 점에서 '승부'는 희귀하면서도 가슴에 담아둘 만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