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의 컴백작으로 화제를 모으는 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은 요란한 화제성 대신 서서히 밀도를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성범죄 피해자 전문 로펌 L&J를 이끄는 세 명의 변호사 이야기라는 설정은 낯설지 않지만, 이 작품은 사건 해결의 쾌감보다 그 이면에 남는 윤리적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시청률 역시 3.1%로 출발해 3회 만에 3.8%(닐슨코리아 전국 기준)까지 오르며 조용한 입소문을 증명하고 있다.
ENA 월화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극본 박가연, 연출 박건호, 이하 ‘아너’)은 거대한 스캔들로 되돌아온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세 명의 변호사 윤라영(이나영), 강신재(정은채), 황현진(이청아)의 이야기를 그린 미스터리 추적극이다. 성범죄 피해자만을 변호하는 로펌 L&J를 배경으로, 이들은 현재의 사건을 좇는 동시에 자신들 스스로를 위협하는 오래된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드라마의 기본 설정만 놓고 보아도, 이 작품이 원작과 동일한 출발선에 서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너’는 2019년 스웨덴에서 첫 방송을 시작해 시즌 3까지 제작된 동명의 드라마(‘Heder’, 영문명 ‘honour’)를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성범죄 피해자를 대리하는 네 명의 여성 변호사가 과거에 함께 저지른 범죄로 인해 현재의 사건과 협박에 휘말리는 구조를 취한다.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비밀은 개별 사건들과 얽히며 서사를 긴박하게 끌고 가고, 북유럽 특유의 어두운 톤과 과감한 설정, 연속적인 반전은 강한 몰입감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이 같은 전개 방식은 자극성 논란이라는 양면적 평가를 함께 불러오기도 했다.
한국판은 이 지점에서 명확한 선택을 한다. 인물을 네 명에서 세 명으로 줄이고, 과거의 비밀을 ‘20년 전 한국대 법대생 시절의 사건’으로 재설정했다. 이는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12부작 미니시리즈라는 포맷에 맞춘 전략적 각색이다. 관계와 사연을 압축한 대신, 인물 각각의 감정선과 윤리적 딜레마를 더 깊이 파고든다.
윤라영(이나영)은 셀럽 변호사라는 외피 아래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품은 인물이다. 강단과 취약함이 공존하는 캐릭터는 배우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설득력을 얻는다. 대형 로펌가의 후계자 강신재(정은채)는 두 번의 정략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로펌을 세운 냉철한 전략가로, 정의와 이해관계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고민을 담당한다. 황현진(이청아)은 불같은 성정의 행동파로, 우정과 가족, 연대의 의미를 감정적으로 체현하는 인물이다. 세 캐릭터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하며, 연대의 균열과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사건의 성격 또한 한국 사회의 현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디지털 성범죄, 조직화된 성매매 카르텔, 침묵을 강요받는 피해자 구조는 더 이상 드라마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판 뉴스에 가깝다. 배우 강은석(이찬형)의 미성년자 성폭행 사건을 출발점으로, 피해자 조유정(박세현)의 거짓 진술과 번복, 모바일 앱을 매개로 한 성매매 스캔들, 이를 둘러싼 권력층의 유착이 드러나며 서사는 확장된다. 여기에 성매매 스캔들을 파헤치던 기자의 죽음과 검사 박제열(신현우)을 둘러싼 과거사까지 얽히며, 이야기는 단순한 법정극을 넘어 사회 구조를 묻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사건은 감정이 아닌 법과 제도의 언어로 설명되고, 인물의 선택은 분노보다 책임의 문제로 귀결된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서사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너’는 한국 드라마가 반복해온 관음의 함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비켜가는 모양새다.
이 같은 태도는 제목에 대한 연출자의 해석에서도 분명해진다. 박건호 감독은 ‘아너(Honour)’를 명예가 아닌 책임감의 문제로 설명한다. 침묵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책임, 승리를 위해 내뱉는 언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말의 무게. 이 주제의식은 주인공들의 로펌 이름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L&J는 Listen(듣고)과 Join(함께한다)의 약자다. 돈과 권력을 좇는 대형 로펌의 생리와 달리, L&J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끝까지 곁에 서겠다는 신념으로 결속된 공간이다. 이 로펌이 상징하는 연대는 성과나 승소율이 아니라 ‘함께 말하는 것’ 자체에 방점이 찍혀 있다.
중요한 부분은 주인공들이 공유하는 ‘과거의 비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다. 원작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세상에 고백하고 법적 처벌을 감수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명예(honour)라는 메시지다. 한국판이 같은 결말을 선택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비밀이 단순한 처벌 장치가 아니라 현재의 정의가 얼마나 불완전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택한 침묵이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드라마는 회피하지 않는다.
결국 ‘아너’가 도달해야 할 지점은 사건 해결 그 자체가 아니다. 세 여성의 연대는 면죄부가 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책임을 향한 선택으로 재구성될 것인가. 명예란 무엇이며, 정의는 어디에서 어떤 얼굴로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한국 사회의 언어로 답할 수 있다면, ‘아너’는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 동시대적 의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