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 모두 마음속에 단종

한수진 기자
2026.02.26 12:16

단종 그 자체로 분하며 흥행 견인

박지훈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단종 역을 맡아 열일곱 소년의 상실과 위엄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는 두 달간 사과만 먹으며 체중을 감량해 캐릭터의 감정을 깊이 있게 연기했다. 유해진은 박지훈을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칭하며 그의 연기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 / 사진=㈜쇼박스

소년은 불행하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떠안은 듯 그늘이 짙게 드리운 얼굴, 사막처럼 메마른 채 꾹 닫힌 입술. 그에게서 십 대 특유의 밝고 가벼운 숨결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어머니는 그를 낳고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역시 그가 열두 살이 되던 해 눈을 감았다. 피붙이인 삼촌은 그를 호랑이가 나오는 산지 험한 곳으로 내몰았다. 더 이상 잃을 것 없어 오직 상실만이 가득한 소년의 얼굴은 퍽 시들시들하다. 참혹한 현실 앞에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이제 어디로 갑니까"라고 묻고, 자신의 앞날이 어디로 향할지 몰라 "그저 두렵다"고 말한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열일곱 소년 이홍위(박지훈)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소년이기 전에 한때 조선의 지존이었던 왕, 단종이다.

하지만 왕위를 빼앗겼다고 왕의 근본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백성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향해 활을 겨누며 "네 상대는 나다"라며 천둥처럼 고함치고, 자신을 내치는 데 앞장선 권력자를 향해 "네 이놈! 네놈이 감히 왕족을 능멸하는가"라며 뒷골이 스산해지는 묵직한 음성으로 꾸짖는다. 그러다 자신을 위로해 준 백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상실과 위엄, 연약함과 분노가 한 얼굴에 서려 있다.

'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 / 사진=㈜쇼박스

이홍위는 바람에 휘는 어린 소나무 같다. 그는 모든 게 무너져버린 자신의 세상에서 지금 당장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걸 안다. 상실은 깊고, 희망은 더디다. 하지만 절벽 끝에서 보수주인 엄흥도(유해진)에게 붙잡힌 손을 조용히 허락한다. 휘청이지만, 뿌리는 아직 땅을 붙들고 있다. 그리고 그 위태로운 중심을 박지훈이 악착같이 제 것으로 붙들고 선다. 상실에 맞서는 '왕과 사는 남자'의 이야기 안에서 이홍위의 존재가 더없이 특별한 건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만 27살이 됐을 뿐인 박지훈은 첫 상업영화에서 자신의 몫을 정확하게 해낸다. 전작 '약한영웅' 시리즈에서 연기한 연시은이 고요하게 끓어오르는 분노의 소년이었다면, 이홍위는 상실을 삼키며 견디는 열일곱 소년이다. 박지훈은 소년 특유의 순수와 그늘을 겹겹이 쌓아 올릴 줄 아는 배우다. 올망졸망한 이목구비는 앳된 느낌을 주지만, 우수를 머금은 눈과 힘이 실린 입술, 선이 분명한 짙은 눈썹, 의외로 낮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는 몸보다 정신이 먼저 자라버린 소년의 결을 잘 보여준다. 때문에 박지훈은 이홍위로 제 나이의 순수성과 처지의 비극성을 더할 나위 없이 꽉 끌어안는다.

'왕과 사는 남자' 박지훈 / 사진=㈜쇼박스

박지훈은 지난 25일 출연한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폐위된 왕의 버석함을 연기하기 위해 두 달간 하루에 사과 하나만을 먹고 체중을 감량했다고 했다. 사과를 택한 이유도 가장 싫어하는 음식이라서다. 이처럼 그에겐 스스로를 극한으로 몰아붙여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집념과 독기가 있다. 그리고 "전 아직 제 연기에 의구심이 많은데 비운의 왕이었던 단종의 마음을 내가 헤아릴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거 같다"고 출연을 고민했던 이유를 밝힌 것처럼, 역할을 대하는 신중함과 진중함도 함께 있다.

또 무엇이든 독하게 해내지만 그렇기에 지난날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연습생 때 출연한 Mnet '프로듀스 101' 시즌2의 유행어 "내 마음속에 저장"으로 대중에 각인됐던 시간 말이다. 무대인사에서 관객이 요청하면 망설임 없이 "내 마음속에 저장"을 보여주고, 장항준 감독을 향해 "내 마음속에 거장"이라고 응용하는 재치까지 발휘한다. 배우가 되기 위해 아이돌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기보다 지나온 시간을 존중한 채 다음 길을 걷는다.

유해진은 박지훈에 대해 "많은 작품을 하지만 사실 되게 마음을 울리거나 큰 감정을 주고받는 그런 상대를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이번에 박지훈이라는 후배가 저한테 그런 큰 걸 안겨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를 자신의 "좋은 친구"라고 했다. 스물일곱의 배우에게, 스물아홉 살 차 선배가 건넨 신뢰다. 그리고 그 신뢰는 지금, 대중의 마음으로 옮겨가고 있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