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서 데뷔해 연기자로 활동 범위를 넓힌 이들을 향한 시선은 오래도록 인색했다. 특히 아이돌 그룹 출신에게는 더 그랬다. 무대 위에서 받았던 스포트라이트,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던 화려함이 오히려 연기자로서는 약점이라는 편견, 그리고 연기는 결국 부업일 거라는 시선이 늘 따라붙었다. 그 견고한 벽을 정면으로 깨고 있는 배우가 있다. 애프터스쿨로 데뷔해 유닛 오렌지캬라멜로도 활동한 배우 나나다.
현재 방송 중인 ENA 월화드라마 ‘클라이맥스’(극본 이지원 신예슬, 연출 이지원)는 아이돌 출신이라는 수식어와 무관하게 현재의 나나를 가장 또렷하게 증명하는 작품이다. 드라마는 대한민국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기 위해 카르텔 한복판으로 뛰어든 검사 방태섭(주지훈)의 생존전을 중심으로, 욕망과 배신, 사랑과 공모가 유기적으로 뒤엉킨 세계를 집요하게 그린다. 이 안에서 나나는 정계와 재계, 그리고 연예계를 넘나들며 정보를 다루는 정보원이자 단숨에 연예계의 신데렐라로 부상하는 황정원을 연기한다.
황정원은 엄마가 죽던 날 삶의 궤도가 뒤틀린 인물이다. 모친의 동거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던 과거는 이 사건 담당 검사였던 방태섭과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출소 후 밑바닥을 전전하던 시간까지 더해져 훗날 그를 방태섭의 정보원으로 이끄는 배경이 된다. 일련의 일들을 통해 방태섭은 황정원의 비상한 머리와 행동력을 간파하고, 황정원은 그가 내민 위험한 손을 주저 없이 잡는다. ‘클라이맥스’의 황정원은 그렇게 탄생한다.
이 캐릭터를 관통하는 나나의 연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절제와 폭발의 정밀한 교차’라 할 수 있다. 극 초반 황정원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인물이다. 웨이트리스로 위장해 정보를 빼내고, 스턴트 배우가 돼 촬영장에 잠입한다. 일을 끝낸 뒤 돈을 받는 태도는 거침없고, 방태섭과 대화를 나눌 때는 오래된 인연이 스치듯 드러난다. 나나는 이 복잡한 결을 과장 없는 눈빛 하나로 정리하며 황정원이 단순한 정보원이 아니라 이야기의 변곡점을 쥔 인물임을 초반부터 예고한다.
이야기가 중반부로 접어들며 나나의 연기는 더 깊어진다. 위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음료를 쏟아 시간을 벌고, 발차기 한 번으로 노트북을 낚아채며 판을 뒤집는다. 기민한 판단력과 절제된 일상성 속에서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폭발력은 황정원이 얼마나 예측 불가한 존재인지, 그 자체로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낸다. 반면 어린 시절 회상 장면에서는 상처와 절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감정의 결이 현재의 냉철함으로 이어지며 황정원이라는 인물의 내면적 축을 완성한다. 장면마다 온도를 바꾸는 나나의 연기는 황정원을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권력 구조를 뒤흔드는 스캔들을 쥐고 있는 핵심 인물로 구축한다.
애프터스쿨 활동 당시 중간 투입 멤버이자 ‘비주얼 멤버’라는 프레임에 갇혀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그는 어느새 유닛 활동을 이끌며 그 유닛의 중심에서 톡톡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더니 영화 ‘패션왕’, 드라마 ‘굿 와이프’를 통해 본격적으로 연기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후에도 영화 ‘꾼’ ‘자백’, 드라마 ‘글리치’ 등을 통해 꾸준히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해왔다. 특히 넷플릭스 시리즈 ‘마스크걸’은 배우 나나의 존재를 완전히 뒤바꾼 작품이었다. 캐스팅 소식이 전해졌던 당시 받았던 우려와는 달리 캐릭터의 광기 분노 좌절을 표정과 눈빛만으로 끌어올린 압도적인 연기로 극의 2부를 평정했다는 평가를 이끌었다. 무엇보다 ‘웃는다’라는 단 한 줄의 지문에서 완성한 연기로 감독을 놀라게 했던 일화는 이 배우가 연기를 대하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클라이맥스’는 지금까지 나나가 구축해 온 필모그래피의 자연스러운 다음 장이자, 그가 선택해 온 캐릭터의 결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하는 작품이다. 익숙한 선택 대신 낯선 얼굴을 향해 달려온 배우. ‘클라이맥스’ 황정원은 그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이제 ‘아이돌 출신’이라는 출발선은 이 배우를 설명하는 데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나나는 지금 권력의 먹이사슬 위에서 가장 서늘하게 빛나는 얼굴로 ‘클라이맥스’의 중심을 뒤흔들고 있다.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