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이 어느덧 45년이 됐지만 최민식은 여전히 목말랐다. 매 작품 누구보다 뜨겁게 이입하며 캐릭터를 만들어온 최민식은 "더 제대로 표현해 보고 싶은 게 많다"며 신인 배우 못지않은 열정을 보였다.
2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맨 끝줄 소년'(연출 김규태, 극본 장명우) 최민식 인터뷰가 진행됐다. 공개 전 걱정도 있었다는 최민식은 "너무 행복하다"는 소감과 함께 인터뷰를 시작했다
"촬영하고 나서 공개되기 전에는 걱정도 됐어요. 여름에는 '참교육'이나 '김부장'처럼 시원시원하고 악을 박살 내는 작품이 좋은데 인간의 욕망이 어떻고 하는 작품이다 보니 좀 걱정을 했어요.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생각할 여지가 있는 드라마를 잘한 것 같아 요즘 너무 행복해요. 물론 호불호는 나뉘지만 모든 사람의 입맛에 딱 맞길 바라는 게 더 이상하죠."
'맨 끝줄 소년'은 실패한 작가이자 국문학과 교수인 허문오가 강의실 맨 끝줄 소년 이강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의 글에 집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서스펜스 드라마다. 최민식은 호불호보다는 '맨 끝줄 소년'의 클래식한 매력에 빠져들어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대본을 읽고 참여를 결정할 때 호불호를 따지면 안 돼요. 그건 나중의 문제고 내가 하고 싶냐 아니냐가 더 중요해요. 요즘 작품과 달리 클래식한 느낌이 나서 좋았어요. 학창시절에도 단행본으로 나오는 단편 소설처럼 울림이 있는 작품을 좋아했거든요. 들춰내고 싶지 않은 것을 까발려서 '인간은 원래 이랬어'라며 불편한 진실을 훌러덩 벗겨내는 게 좋았어요."
최민식은 괴팍한 국문학과 교수 허문오 역을 맡았다. 독설도 악평도 아까운 형편없는 글 속에서 유일하게 다음 문장을 궁금하게 하는 이강의 글에 빠져든 최민식은 그를 특별한 제자로 맞게 된다. 다만, 이강의 정체와 진짜 목적이 드러나자 개연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있었다. 최민식은 이와 관련해 솔직하게 자신의 선택을 털어놨다.
"개연성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그 어릴 때 한마디 들었다고 복수의 칼날을 가냐'는 분들이 계시던데 저는 있을 수 있다고 봐요. 현실에도 '이걸 시나리오로 쓰면 투자가 돼?'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많잖아요. 개인적으로도 초등학교 2~3학년 때 폐결핵에 걸렸는데 의사가 제 앞에서 가망이 없다는 말을 했던 게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아주 순수한 시절 가슴이 대못이 박히는 이야기를 들었던 건 평생 가는 거에요.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허문오를 인수분해한다고?'라고 말하실 수 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허문오가 이강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드러낸 것처럼 최민식 역시 이강을 연기한 최현욱에 대해 "대만족"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이 작품에서 저는 탁구로 치자면 리시브를 잘해야 하는 역할이에요. 이강이 짜놓은 판과 함정에 여지없이 걸려들어 가잖아요. 태풍의 중심처럼 이강이 돌면 제가 도는 거죠. 최현욱의 연기에 어떻게 리시브 하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매번 보고 느끼는데 아주 잘하더라고요. 대만족했어요."
최민식은 이날 인터뷰 전부터 꾸준히 최현욱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현욱이 대선배를 사로잡은 비결은 결국 연기였다.
"저는 연기 잘하면 이뻐요. 제 파트너잖아요. 카메라 앞에서는 선후배가 아닌 동료로서, 각자의 배역으로 서 있는 건데 놀랄 때가 많았어요. '교수님도 아세요? 그런 마음'하는데 한 방 먹는 거죠. 그런 눈빛과 에너지가 와서 꽂히니까 저도 반응을 할 수 있는 거예요."
허문오가 이강의 천재성을 알아본 것처럼 최민식 역시 후배 배우들의 재능을 알아보는 경우가 있을까. 최민식은 "너무 띄워주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다시 최현욱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현욱이 세대는 제가 할 때와는 다르더라고요. 미디어 환경도 달라지고 SNS가 있다 보니 나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고 할까요. 그게 좋고 깜짝 깜짝 놀라요. 제가 누구의 천재성을 감별할 주제는 못 되지만, 젊은 후배들과 연기할 때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굉장히 신선한 자극이 돼요."
과거 무심코 내뱉었던 말 한마디가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점에서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와 비교하는 시청자들도 많이 있다. 최민식 역시 "공통분모가 있다"며 말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다.
"촬영할 때는 안 떠올랐는데 완성하고 나니 공통분모가 있더라고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말과 글에 의한 폭력이 잖아요. 무심코 뱉은 말이 이강에게 상처를 입히고 이강은 또 글이라는 수단으로 복수를 하게 되고요. 요즘 세상에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요. 언어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과 글로 상처를 주고 불신을 넘어 증오와 분노를 극한으로 가게하는 데 구업(口業), 그리고 글로 하는 폭력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다양한 주제를 전하는 과정에서 허문오는 결국 파멸을 맞이한다. 최민식 역시 개인적으로는 허문오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도 누구보다 허문오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고 밝혔다.
"개연성을 지적하는 분들이 계셨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믿고 연기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연기하면 안 돼요. 저도 허문오를 싫어 하지만, 누구보다도 든든한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 거예요. 실제 옆에 있었다면 '너 왜 그러고 사냐' 라고 한 소리 하고 싶어요. 동시에 측은지심이 들기도 해요. 나쁘고 악한 놈이 아니라 모자란 놈이잖아요. 근사하고 멋있는 인간도 좋지만,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면서 본인은 얼마나 더 괴로웠을까 싶어요."
그리고 이는 허문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작품과 캐릭터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본인이 먼저 캐릭터에 깊이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뚝 떨어져서 보면 작가로서 최소한의 윤리의식도 없는 놈이죠. 그런데 연기할 때는 객관적으로 떨어져서 하면 안 돼요. 내 두 번째 소설이라면서 가슴에 안는 장면 같은 건 계산하고 나온게 아니에요. 제 가치관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지만, 세상에 이해 못 할 일은 없거든요. 그 사람이 아프면 아픈거에요. 찌질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이해하려고 했어요. 허문오의 말과 행동에 정당성을 가져야 하 는게 배우의 할 일인거죠. 제 기준으로만 한다면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같은 역할도 할 수 없죠."
계속해서 캐릭터에 빠져들며 40년 넘게 연기를 해온 최민식도 연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멈추지 않는 건 결국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흥분이 되고 그 외에는 심심해요. 얼굴 팔려서 짜릿한 일탈을 시도할 수도 없고요. 작품을 할 때 제일 행복하고 자유로워요. 물론 매번 즐겁게 작업하지는 않아요. 표현의 한계에 부딪힐 때도 있고, 제 가치관·도덕성을 깨부숴야 할 때도 있고요. 이런 건 주제의식과도 연관돼요. 예를 들어, '맨 끝줄 소년'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생각해보면 아까 말한 구업외에 관음도 있어요. 요즘 관찰 예능 많잖아요. 범죄다 아니다의 개념을 떠나 남의 삶을 보는 게 익숙하고 죄의식을 못 느끼고 사업적으로도 활용하잖아요. '맨 끝줄 소년'은 이렇게 여러 주제가 있어서 좋았어요."
K-콘텐츠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제작 여건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최민식은 "외형을 넓히려다보면 허문오처럼 된다"며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대신 계속해서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싶다며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뭘 대표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제 일을 열심히 할 뿐이죠. 그러다 보니 인정받게 되는 거죠. 다만, 외형적인 파이를 넓히려고 접근하면 허문오처럼 된다는 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요. 상 준다는데 싫은 놈 어디 있겠냐만은 상이 전부가 아니에요. 이젠 더 제대로 표현해보고 싶은게 많아요. 여태까지 살면서 겪은 사랑, 애정, 분노, 정의 등을 취합해서 표현해 보고 싶어요. 너무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그런데 또 이놈의 일이라는 게 습관처럼 '노느니 일하자' 하는 건 안 되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