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가 조세이 탄광 수몰 사건을 통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의 참상을 되짚었다.
지난 10일 방송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는 '검은 뼈 - 49년 만에 전해진 부고' 편으로 꾸며졌다. 전 수영 국가대표이자 해설위원 박태환, 가수 김종서, 배우 변요한이 리스너로 참여해 83년간 바닷속에 묻혀 있던 희생자들과 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여정을 함께 들여다봤다.
이날 방송은 닐슨코리아 전국 평균 시청률 1.7%를 기록했다. 최근 6개월간 방송분 가운데 처음으로 1%대에 진입하며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한반도 곳곳의 청년들을 강제로 동원했다. 신체검사를 받은 청년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일본으로 끌려갔다.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자리한 조세이 탄광 역시 이들이 보내진 곳 중 하나였다. 탄광을 둘러싼 높은 울타리와 감시 초소, 탈출을 막기 위한 전기선은 감옥을 연상케 했다. 도망치다 붙잡힌 노동자들은 가혹한 폭행과 고문을 견뎌야 했다.
바다 아래로 갱도가 뻗어 있는 조세이 탄광의 작업 환경은 열악했다. 광부들은 비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허리를 굽힌 채 하루 12시간씩 2교대로 일했다. 깊숙한 갱도에서는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대화마저 금지됐고, 머리 위로 배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태환은 "내가 폐소공포증이 없는데도 생길 것 같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위태로운 노동 현장은 1942년 2월 참사로 이어졌다. 해저 갱도의 천장이 무너지며 바닷물이 밀려들었고, 작업 중이던 광부 183명이 순식간에 갇혔다. 해수면 위로 하얀 거품과 수십 개의 물기둥이 솟구쳤지만, 일본 헌병대는 구조에 나서는 대신 판자와 각목으로 갱도를 막았다. 유족들은 가족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참사의 배경에는 무리한 증산 정책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석탄 생산량을 늘리려던 일제는 안전을 담당하던 인력까지 채굴에 동원했고, 갱도 붕괴를 막는 탄주마저 파냈다. 사고 며칠 전부터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바닷물이 갱도로 스며들었지만 작업은 계속됐다. 김종서는 "전쟁에 몰두한 나머지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라며 탄식했다.
묻혀 있던 비극이 다시 알려진 것은 사고로부터 49년이 흐른 1991년이었다. 우베시의 고등학교 교사 타케노부 야마구치는 옛 탄광 사택을 방문한 일을 계기로 사건을 접했다. 이후 뜻을 모은 일본 시민들과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이하 '새기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사찰에 남아 있던 창씨개명 사망자 명부를 단서로 유족을 찾아 나섰다. 조선의 옛 주소지로 보낸 편지는 100통이 넘었고, 그중 17통의 답장이 돌아왔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 아버지의 생사도 알지 못했던 유족들에게 뒤늦은 부고가 전해졌다. 이후 한일 합동 추도식이 열렸고, 희생자들의 본명을 새긴 추도비도 세워졌다. 박태환은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새기는 모임'은 유골 수습에도 나섰다. 희생자들을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옛 도면과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수색을 이어갔다. 그 결과 2024년 9월 사고 82년 만에 헌병대가 봉쇄했던 갱구를 여는 데 성공했다.
2025년 8월에는 한국인 잠수사들이 해저 갱도 진입을 시도했다. 마침내 사고 83년 만에 바닷속에 남아 있던 희생자들의 검게 변한 유골이 처음으로 발견·수습됐다. 박태환은 "영화에서나 봤다"라고 놀라움을 드러냈고, 김종서는 "너무 오래 걸렸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2026년 1월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수습된 유골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DNA 감정 협력이 약속됐다. 다만 희생자들의 정확한 신원과 남아 있는 유해의 규모, 추가 발굴·수습 계획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방송 말미 변요한은 "양심, 사명감, 부끄러움을 아는 일, 그리고 일본 시민들의 사죄의 말까지, 모두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종서는 "갱도 입구가 열리는 순간, 피고름이나 눈물 이런 것들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울컥했다. 박태환은 "더 늦기 전에 하루빨리 남은 유골들을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조속한 수습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