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아이를 거뒀다는 이유로 칭찬이 쏟아졌다. 최불암은 그 칭찬이 부담스러웠다. 작가가 쓴 이야기를 연기했을 뿐인데 자신이 좋은 일을 한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2일 고인의 장례미사에서 황영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회장이 전한 이야기다. 1981년 '전원일기' 속 금동이 입양은 그렇게 화면 밖의 나눔으로 이어졌다. 최불암은 좋은 아버지를 연기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달 29일 향년 87세로 별세한 최불암의 발인이 2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여의도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운구 행렬은 초록우산 본부를 거쳐 장지인 경기 파주 동화경모공원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아이들의 곁을 지켰던 배우의 마지막 길에도 그 인연이 함께했다.
1959년 연극 '햄릿'으로 출발한 그의 연기 인생은 67년에 걸쳐 이어졌다. 대표작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는 각각 18년, 22년 동안 방송됐다. 오랫동안 같은 배역을 연기했다고 모두 시대의 얼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불암은 인물이 지켜야 할 원칙과 사람에게 내줄 온기를 함께 표현했다.
'수사반장'의 박영한 반장은 범인을 잡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사건 뒤에 놓인 사정과 약자의 고통을 헤아렸다. 범죄 앞에서는 단호하되 사람까지 쉽게 단죄하지 않는 형사였다. 정의가 지켜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얼굴, 시청자가 박 반장에게 기대었던 것은 그런 신뢰였다.
'전원일기'의 양촌리 김 회장은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품었다. 무뚝뚝하고 때로 고집도 부렸지만 가족과 이웃의 일을 제 일처럼 받아들였다. 김혜자와 오랜 부부의 시간을 쌓아가는 연기에는 관계를 설명하는 대사보다 익숙한 호흡이 먼저 있었다. 농촌의 일상을 지켜보던 시청자는 그의 얼굴에서 자기 아버지와 고향 어른을 발견했다.
근엄함만으로 사랑받은 배우도 아니었다. 1990년대 '최불암 시리즈'가 유행하고 특유의 웃음소리까지 회자된 것은 그가 얼마나 친숙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준다. 존경받는 어른이면서 편하게 웃음의 주인공으로 불러낼 수 있는 배우였다.
2011년부터 14년간 진행한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연기가 아닌 경청으로 사람을 만났다. 누군가 내놓은 음식을 맛보고, 그 밥상을 차리기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 배우가 방문한 자리를 평범한 이웃의 삶이 주인공이 되는 시간으로 바꿨다.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렇게 세대가 다른 시청자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빈소를 찾은 얼굴들은 그 시간을 증언했다. 김혜자와 고두심, 유인촌 등 '전원일기'의 동료들부터 '수사반장 1958'에서 젊은 박영한을 연기한 이제훈까지 세대를 잇는 조문이 이어졌다. 김혜수는 빈소가 차려진 날부터 유족 곁에서 조문객을 맞았고 발인까지 함께했다. 많은 이들이 슬퍼했고, 저마다의 기억 속에 남은 그의 다정함을 이야기했다.
최불암은 화면 밖에서도 아이들 곁을 지켰다. 45년간 초록우산과 함께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동료들에게도 나눔을 권했다. 다시 출발할 기회가 필요한 청소년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사단법인 제로캠프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장을 맡아 2012년부터 14년간 김천소년교도소 청소년들의 연극·뮤지컬 교육과 사회 복귀를 지원했다. 평생 쌓아온 연기 경험과 인연을 다음 세대의 삶을 위해 나눴다.
그 오랜 인연은 마지막 배웅으로 이어졌다. 이날 초록우산 본부 고별식에는 임직원 300여 명과 이홍렬, 송일국, 김경란, 앤디 등이 함께했다. 송일국이 영정사진을 들었고, 지나던 시민들도 걸음을 멈추고 작별 인사를 전했다. 추모사를 읽은 김선희 팀장은 어린이 곁을 지키는 든든한 어른이 돼야 한다던 고인의 말을 되새기며 그 뜻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누군가를 오래 보살핀 삶은 남은 이들이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돌아왔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우리 시대의 아버지로 오랜 세월 국민 곁을 지켜주신 선생님을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또 "좋은 배우가 되려면 자신이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고인의 말을 되짚으며 연기를 넘어 이웃의 아픔을 돌아본 삶을 기렸다. 정부는 고인에게 최고 등급의 문화훈장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는 아버지를 연기했고, 그 연기를 믿었던 사람들 곁에서 어른으로 살았다. 많은 이들의 안녕을 살폈던 '국민 아버지', 부디 평안히 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