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라고 알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과 만나 소주 한잔 기울이던 중 한 놈이 뜬금포(?)를 날린다. '종말론 얘기가 다시 도나? 요즘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지레짐작하는 사이 뜬금포의 주인공이 답을 내어놓는다.
이제 막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조카에게서 듣고 자기도 깜짝 놀랐단다. 요즘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는 임대주택 사는 아이를 '휴거'라고 부른다고. 휴거는 종말론도 뭣도 아닌 '휴먼시아 거지'의 줄임말이라고.
'말도 안 돼. 같은 반 친구한테 그렇게까지 하겠어.' 설마 하는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포털사이트를 검색했더니 실제 '휴거' 얘기가 적잖다. 공공 임대주택 사는 사람인데 자기 아이도 그런 놀림을 받을까 고민이라는 글부터 아이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게 한 부모가 문제라는 격앙된 말까지 '휴거'를 걱정(?)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임대아파트 거지', '초등학생 휴거' 등 관련 검색어도 부지기수다.
휴먼시아는 불과 몇년 전까지 쓰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임대아파트 브랜드다. 휴먼시아는 한때 판교신도시, 서울 상암동 등 요지에 임대아파트를 공급하며 성공적인 브랜드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휴먼시아 브랜드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휴먼시아=가난한 아파트'라는 낙인이 브랜드 사용을 중단하게 된 이유라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휴먼시아는 'human(인간, 인류)과 'sia'(넓은 공간, 대지)를 합친 말이다. 말 그대로 '인간의 공간', '함께 하는 공간'이란 의미다. 그런 휴먼시아가 어느새 가난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말이 돼버렸다.
'선생님, XXX동 아이들은 따로 모아서 공부시키면 안 돼요?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섞이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XXX동은 이쪽 출입구랑 엘리베이터 사용하지 말아요. 그 돈 내고 이 아파트 사는 것만도 감지덕지지. 어딜….' 일반 주민 중 일부는 임대주택의 '임'자만 들어도 경기에 걸리는 듯하다. 그들에게 싼 임대료를 내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임대주택 주민들이란 비싼 돈 주고 분양받은 내 집의 가치를 갉아먹는 적들이다.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없다. '저 집 아버지는 대기업 임원이라는데. ○○이 학원 어딘지 좀 알아봐', '그 집은 임대잖아. □□이랑은 같이 다니지 마' 요즘 초등학생들은 친구를 사귀기 전 그 아이가 몇동에 사는지, 집은 몇 평인지, 아버지 직업은 무엇인지 사전 호구조사가 필수다.
조금 더 가진 어른들은 덜 가진 어른들을 향해 치졸하기 그지없는 우월감을 드러내고 이는 다시 아이들에게서 가난에 대한 그릇된 편견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아이들은 임대주택 사는 친구들을 스스럼없이 '거지'로 부르고 가난한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이재를 밝힌다는 유대인조차 가난한 사람을 경멸하고 손가락질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경멸하는 것은 가난과 그 가난을 가져오는 게으름이다. 그 경멸스런 가난이 널리 퍼지지 않도록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 또한 유대인의 오랜 철칙이다. 알량한 우월감으로 차별을 가르치기보다 서로 도와가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