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의 권리'가 아직은 낯선 나라[우보세]

권화순 기자
2020.09.03 07:02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전세 품귀"

임대차보호법 시행 이후 지난 한달 간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전세 매물이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도 함께 나왔다. 대게는 임대차법 '부작용'의 증거로 해석되지만 '부작용' 인지, '긍정적' 신호인지는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임대차법으로 전월세 계약을 1회 연장할 수 있는 세입자의 권리가 생겼고 임대료 상승폭은 5%로 제한됐다.

이사를 즐기는 사람은 없다. 세입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살던 곳에서 쭉 살기를 희망한다. 과거엔 집주인 요구를 들어줄 수 없거나 조건에 맞지 않으면 내쫓기듯 이사를 갔던 세입자들이 지금부터는 계약 갱신 하는 사례가 늘 것이고, 자연스럽게 시장에선 전세 매물도 줄 것이다. 시장 매물은 줄겠지만 매물을 찾는 수요자도 함께 줄기 때문에 '매물 감소'는 부작용이 아닌 당연한 귀결인 셈이다.

"월세전환 가속화"

이 역시 임대차법 부작용으로 자주 거론된다. 전셋값을 4년간 못 올리는 집주인들이 아예 월세로 전환할 것이란 추정이다. 이는 설득력 있는 말이지만, 아직 이런 변화가 감지되진 않았다. 지난달 전월세 시장에서의 전세 비중은 72.8%로 지난해 같은 달 70.4% 대비 도리어 늘었다. 월세는 반대로 29.6%에서 27.2%로 줄었다. 추정과는 반대였다.

세입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전세계약을 월세로 전환하지 못하도록 한 임대차법 개정안이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 월세 가속화를 우려한 정부가 법 개정을 하면서 '선수'를 친 것이다. 월세 가속화를 우려한 미래의 세입자들이 미리 전세계약을 당겨 하는 바람에 전세 비중이 늘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저금리 기조와 함께 집값이 더 오르지 않을 것이란 심리가 확산하면 월세화는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 이를 굳이 임대차법의 부작용으로 국한해 볼 일은 아니다.

"전셋값 급등"

서울 전셋값이 61주 연속 올랐다. 주간 상승폭이 둔화되고 있다고는 해도 임대차법 시행 이후 전세값이 불안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국가승인 통계인 한국감정원 시세나 민간의 KB부동산 시세 모두 신규 전세계약만을 기준으로 전셋값 통계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대차법 시행으로 임대료 5% 증액이 제한되는 갱신계약이 이달부터 나오기 시작하지만 정작 전셋값 통계엔 반영되지 않는다.

갱신계약에선 가격이 덜 오르고, 신규계약은 급등하는 현상이 동시에 벌어질 것이다. 임대차 의무 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확대했던 지난 1998년 약 4개월 간 전세값이 급등했다고 한다. 신규계약만 계속 오르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결국 모든 전세계약에 임대료 증액 제한을 하는 '표준임대료' 제도 도입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주인과 세입자 편가르기"

정부가 입대차법을 개정해 "집주인과 세입자 편가르기 했다"는 비판도 쏟아졌다. '세입자 내쫒는 법', '집주인 골탕먹이는 법' 등 자극적인 소재가 언론을 통해 소비되기도 했다. 과거 수십년간 당연했던 집주인의 권리가 당연하지 않게 된 시대, 반대로 과거엔 부자연스러웠던 세입자의 권리가 법적인 권리로 인정받게 된 전환기에 혼란은 불가피하다.

임대차법은 집주인과 세입자의 '합리적인 합의'를 기본 전제로 하는 법인데도 "집주인이 5% 이하 증액을 하면 세입자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구를 법안에 넣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는 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전 인정돼 온 ‘세입자의 권리’가 아직 우리 사회에선 낯설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전세품귀, 월세화 우려, 전세값 급등, 세입자·집주인 편 가르기 등등의 부작용을 먼저 우려할 일이 아니라 전월세 시장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정상화되고, 세입자 주거안정을 위한 출발점에 섰음을 긍정하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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