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생태계 망치는 무늬만 모험자본…실패 용인 투자문화 필요"

최우영 기자, 김진현 기자
2026.07.30 05:00

연대보증부터 RCPS까지…'모험' 사라진 K-모험자본

['모험'보다 '안전' 베팅K-모험자본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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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계약에 등장하는 주요 투자자 보호장치/그래픽=이지혜

벤처투자는 실패를 전제로 설계된 자본이다. 열 곳에 투자해 아홉이 무너져도 하나가 크게 성공하면 되는 구조, 그래서 '모험자본'이라 불린다. 그런데 국내 벤처투자 관행은 모험과 거리가 멀다. 과도하게 설계된 투자자 안전 장치가 회사의 실패를 고스란히 창업자 개인의 파산으로 연결시킨다.

이는 벤처투자의 실패를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국내 투자 생태계의 풍토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역시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표준계약서 개정에 나서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정책금융기관의 정책 기조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창업자 옭아매는 '첩첩산중' 투자자 보호 조항

벤처투자 계약서에서 창업자 연대보증은 한때 기본값이었다. 최근 제도적으로는 사라지는 추세지만 '이해관계인'이라는 이름으로 최대주주나 경영진 개인이 사실상 같은 의무를 지는 우회로가 남아 있다. 투자자 보유지분을 창업자에게 강제 매각할 수 있는 풋옵션(주식매도청구권), 다수 주주가 회사 매각을 결정하면 창업자 지분까지 강제로 팔아야 하는 드래그얼롱(동반매도청구권) 등도 투자자 보호를 위해 창업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밖에도 기업가치가 떨어진 상태로 후속 투자를 받을 때 기존 투자자의 전환가격을 낮춰 지분율을 방어해주는 리픽싱(전환가액 조정), 실제 손해 규모와 무관하게 미리 정해놓은 금액을 투자자에게 물어내게 하는 위약벌 조항 등도 창업자를 압박하는 악습으로 꼽힌다.

국내에서 벤처투자 수단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상환전환우선주(RCPS)도 마찬가지다. 투자자는 조건이 안 맞으면 투자금을 돌려받을 권리(상환권)와, 유리한 시점에 보통주로 갈아탈 권리(전환권)를 동시에 쥔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는 "상환권은 배당가능 이익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데 스타트업에 그 정도의 이익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파괴적인 조항들은 전환권과 리픽싱"이라며 "다운 라운드(기업가치가 낮아진 채 진행하는 후속투자)로 투자를 유치할 때 리픽싱이 걸리면 지배구조가 뒤집히고, 그 탓에 기존 투자자에게 리픽싱 포기나 면제를 요청하다 협조가 안 돼 후속 투자 자체가 무산되는 일도 벌어진다"고 전했다.

실패 용인하는 공감대 부족, 투자자 보호장치로 나타나
스타트업 투자 연대보증 피해자로 꼽히는 하진우 어반베이스 창업자. /사진=하진우 페이스북

국내와 달리 실리콘밸리 등 해외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스타트업 투자 대부분이 실패한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 개별 실패를 창업자 개인 책임으로 환원하는 계약이 자리 잡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 벤처캐피탈(VC) 업계에서는 애초에 연대보증 조항이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게 현지 투자자들의 설명이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순수 민간 VC부터 정책자금이 섞인 펀드, 금융지주 계열 투자사까지 출자자 스펙트럼이 넓고 저마다 감내할 수 있는 손실의 폭도 다르다. 실패를 용인한다는 합의가 생태계 전체에 균일하게 깔리지 못한 것이다.

한 VC 투자심사역은 "한 개인투자조합에서는 투자와 대출을 구분하지 못한 개인 출자자가 '내 돈 내놓으라'며 심사역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경우까지 있었다"며 "비단 개인 투자자만이 아니라 기관 담당자들 역시 투자자가 아닌 채권자처럼 굴 때가 있다"고 꼬집었다.

투자 계약서상 연대보증이나 이해관계인 조항으로 인해 창업자 개인이 책임을 떠안는 사례는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프롭테크 스타트업인 어반베이스 창업자 하진우씨는 연대보증 문제로 투자사 신한캐피탈과 갈등을 빚었다. 콘텐츠 스타트업 오지큐 창업자 신철호씨도 조건부 투자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인'으로 이름을 올린 뒤 투자받은 금액 90억원과 지연이자 등을 개인 돈으로 갚을 상황에 놓였다.

"투자 실패 용인하는 문화, '정책금융' 앞장서야"
지난 6월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SVC서울에서 열린 모태펀드-국민성장펀드 이어달리기 간담회에서 이억원 금융위원장과 노용석 중소벤처기업부 1차관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부 역시 이 같은 투자자 보호장치를 완화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중소벤처기업부가 내놓은 벤처투자 표준계약서 개정안은 RCPS 대신 CPS(전환우선주)를 쓰도록 권고한다. 상장을 '반드시 달성해야 할 결과 의무'로 규정하는 대신 '성실히 노력할 의무'로 바꿔 시장 침체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위약벌 사항에서 창업자를 보호하도록 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담기지 않은 문제들이 실제 창업자를 압박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게 스타트업 업계의 목소리다. 풋옵션과 위약벌이 실제로 어떻게 행사되는지는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모태펀드 자펀드가 창업자를 상대로 풋옵션이나 위약벌을 행사하는 실태 역시 모니터링되지 않고 있다.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의 정책기조 역시 투자자들의 '보신주의'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온다. 투자한 기업의 부실이 불거지면 사후관리를 문제 삼아 운용사를 압박하고, 취득가보다 기업가치가 떨어지면 손상차손을 잡아 관리보수를 깎기도 한다. 운용사들은 출자자가 엄격하게 관리할 것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창업자에게 더 강한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이는 고스란히 창업자를 옥죄는 독소 조항으로 돌아온다.

김성훈 변호사는 "VC들이 모험자본 역할을 안 하고 채권자처럼 군다는 건 맞지만 그게 꼭 VC들의 악의 때문은 아니다"며 "정책 LP 차원에서 운용사들에게 적절히 판단하고 운용할 재량과 자율권을 주지 않는다면, 운용사 입장에선 눈치를 보고 과도한 안전 조치를 취해 결국 창업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바라봤다.


25년 묵은 RCPS 투자 관행…'R' 떼어낼 수 있을까

['모험'보다 '안전' 베팅K-모험자본의 민낯]

벤처 투자 유형별 금액 및 비중 추이. 벤처투자종합포털 자료 재가공. 우선주의 대부분이 RCPS라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그래픽=윤선정

중소벤처기업부가 벤처투자 표준계약서를 개정하고 상환권(R)이 빠진 전환우선주(CPS) 사용을 권고하고 나섰다. 25년 넘게 국내 벤처투자 시장에서 기본 투자 방식으로 쓰여온 상환전환우선주(RCPS)의 관행을 깨고 글로벌 표준에 맞춰 투자 환경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다. 현장에서 오랜 기간 제기된 실효성 논란을 해소하고 스타트업 창업자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RCPS는 회사가 이익을 냈을 때 투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상환권과 보통주로 바꿀 수 있는 전환권, 배당 우선권이 결합된 주식 형태다. 문제는 상법상 상환권 행사가 '배당가능이익'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바이오나 IT(정보통신) 등 대다수 초기·기술 스타트업은 적자 상태여서 배당가능이익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계약서상에는 존재하는 권리이지만 정작 회사가 어려울 때는 행사할 수 없고, 이익이 날 정도로 성장한 회사에는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는 역설적인 구조다. 게다가 회계기준에 따라 부채로 인식될 수 있어 스타트업의 재무구조를 왜곡시킨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지만 여전히 벤처투자 계약의 대부분은 RCPS로 이뤄진다. 벤처투자종합포털에 따르면 매년 전체 벤처투자의 70%가량이 우선주 형태로 집행된다. 업계 관계자는 "이들 우선주 거래의 대부분이 RCPS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RCPS가 투자 현장에 본격 도입된 것은 2001년 무렵이다. 1999년 말 벤처버블이 붕괴되면서 대규모 손실을 입은 당시 창업투자회사가 원금 회수용 안전장치로 상환권 조항을 활용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창투사의 주요 투자 대상이 대기업 협력사나 납품 기업, 계열사 등 이미 일정 수준의 상환 이익을 내는 곳들이 많았지만, 상장(IPO)을 통한 회수 가능성이 낮아질 경우를 대비해 RCPS를 보편적인 투자 수단으로 채택했다.

한 VC 심사역은 "바이오 기업의 경우 IPO 이후 시점까지도 배당가능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해 사실상 RCPS로 투자하는 의미가 없다"라며 "오랫동안 관행적으로 해오던 방식인 탓에 관례적으로 유지해왔으나, 최근 들어서야 비로소 CPS 투자 등 대안적인 형태를 조금씩 검토하는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CPS가 RCPS를 대체해 투자 현장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기까지 최소 2~3년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선행 라운드로 인한 구조적 '록인(Lock-in)' 영향이다. 기존 주주들이 RCPS로 들어간 상태에서 후속 투자에 참여할 경우, CPS로 투자를 하려고 하더라도 출자자(LP) 측에서 '왜 우리만 불리한 조건으로 들어가느냐'며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평상시 보통주나 CPS를 선호하는 외국계 VC 역시 국내 투자에서 리드 투자자가 아닐 경우, 단독으로 투자 조건을 바꾸기 어려워 기존 RCPS 양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실정이다.

중기부 개정안이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에 그친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각 운용사의 관리부서나 투자팀으로 내려오는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한, 현장의 관성에 따라 익숙한 RCPS 계약서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금융위원회 관할인 신기술사업금융회사(신기사) 등은 중기부의 권한 밖에 있어 상환권을 포기할 유인이 크지 않다.

안희철 법무법인 디엘지 대표변호사는 "법적 강제력이 없는 표준계약서만으로는 VC가 보수적인 LP를 설득하기 어렵다"며 "한국벤처투자 출자사업 등에서 CPS 투자 건에 가점을 부여하는 등 정책적 유인책이 동반돼야 LP와 VC 모두 적극적으로 CPS 전환에 나설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기술보증기금 연도별 RCPS 투자 추이/그래픽=임종철

정책금융기관과 보수적인 금융권 LP의 내부 규정도 관행을 유지시키는 요인이다. 손실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따지는 감사 부담 탓에, 현장에서는 배당가능이익이 없어 실제 행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알면서도 상환권을 '심리적 안전판'으로 계약서에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RCPS 선호 경향은 데이터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확인된다. 기술보증기금의 최근 5년간 투자 내역을 살펴보면 전체 직접투자 건수의 상당 부분을 RCPS 형태로 집행한 것으로 집계됐다.

한 VC 관계자는 "실효성이 적은 상환권 조항을 빼고 계약을 진행하면 VC 입장에서도 계약 검토나 관리 부담이 줄어들어 훨씬 효율적"이라며 "주요 LP들이 투자 가이드를 정비하거나 인센티브를 내거는 등 규정 개선이 병행돼야 현장의 변화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VC, 연대보증 질문에 당황한 이유 "그럼 누가 창업해"

['모험'보다 '안전' 베팅K-모험자본의 민낯]

실리콘밸리 로펌 '쿨리'의 투자계약 중 상환요구권 포함 계약 비중/그래픽=최헌정

벤처투자 본토인 실리콘밸리에서는 스타트업의 실패 책임을 창업자 개인에게 물어 투자금을 회수하는 관행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벤처투자계약 독소조항으로 꼽히는 '연대보증'도 애초에 자리 잡은 적이 없다. 스타트업 투자의 대부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출자자부터 운용사, 창업자 모두가 공유하는 문화 덕분이다.

28일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계약을 가장 많이 다루는 로펌 중 한 곳인 '쿨리(Cooley)'의 분기별 벤처투자 보고서를 보면 '상환권' 조항을 삽입한 계약 비중은 매 분기 2~6% 수준이다. 국내 벤처투자계약 대부분이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이뤄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 국내 대형 벤처캐피탈(VC) 관계자는 "최근 CPS로 작성하는 계약이 조금 늘어났지만 여전히 RCPS 계약이 85~90%를 차지한다"고 전했다.

쿨리에 따르면 실리콘밸리 투자 관행은 투자자 보호를 우선시하는 한국과 달리 대체적으로 창업자에게 기울어 있다. 쿨리의 지난해 4분기 기준 계약의 98%가 투자금의 100%만 우선 회수하는 조건이었다. 전체 계약의 96%는 원금 회수와 지분율 배분 중 하나만 택할 수 있는 '비참가적 우선주'였다.

리픽싱은 격차가 더 크다. 2024년 3분기 쿨리 집계에 따르면 이 시기 전체 투자 계약에 가중평균 방식이 적용됐다. 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최저가 방식(풀래칫)을 적용한 계약은 한 건도 없었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가 표준계약서 개정을 통해 권고한 가중평균 방식이 미국에서는 이미 표준으로 굳어져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창업자 중심 계약 관행은 실패를 용인하는 실리콘밸리 벤처투자 문화의 토대 위에서 생겨났다는 게 정설이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는 "실리콘밸리 VC 대표에게 미국에는 왜 연대책임 조항이나 풋옵션이 없는지 물었더니 '원래 없던 걸 왜 없냐고 물어보니 당황스럽다'고 하더라"며 "벤처 스타트업의 99%가 위험한 일에 도전하다 실패하는데 그때마다 연대책임을 물으면 누가 창업할 수 있겠냐는 반문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투자자가 조건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시장 구조도 작용한다. 유망한 스타트업일수록 투자자를 고를 수 있어, 창업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거는 투자사는 좋은 딜에 들어가지 못한다.

한 VC 투자심사역은 "실리콘밸리에 투자자 안전 장치가 국내보다 적은 것은 투자자들이 관대해서가 결코 아니다"며 "실패가 기본값인 시장에서 회수를 개인에게 떠넘기는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태계 전체가 학습한 결과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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