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만든 노하우, AI도 못 따라와…'정년' 된 명장, 회사가 붙잡았다

차현아 기자, 우경희 기자
2026.09.27 09:00

[MT리포트]정년 밖 '시니어' 일터 (下)

[편집자주] 2024년 12월 초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정년연장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의제다. 논의는 정년까지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전제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정년연장 대상인 중소기업 근로자 148만명 중 62만8000명(42%)이 정년제 밖에 있다. 영화 '인턴' 최민식 배우처럼 시니어 재고용 기회는 없는걸까? 정년연장의 현실을 짚고, 국내 기업 사례와 일본·독일 등 고령화 국가의 해법, 여야·노사가 맞선 정치권 논의 상황을 통해 바람직한 정년연장의 방향을 모색한다.
AI도 이렇게 못 한다..."정년? 남아주세요" 회사가 베테랑 붙잡은 이유

-정년 후 재고용 정기설 명장 인터뷰

지난 9일 충남 아산에 위치한 동원시스템즈 아산사업장에서 만난 정기설 명장./사진제공=동원그룹

지난 9일 찾은 충남 아산에 위치한 동원시스템즈 아산사업장. 마스크와 방진모를 착용하고 들어선 공장 내부에는 인쇄기 소음과 잉크 냄새가 가득했다. 이 곳은 동원그룹 제품을 비롯해 국내 주요 식품기업의 라면과 과자 등 주요 식품 연포장재를 전문적으로 인쇄하는 생산 거점이다.

포장재들은 인쇄기의 롤러 위를 빠르게 통과하고 있었다. 이후 투명 필름지 위로 대형마트와 편의점 매대에서 흔히 보던 브랜드명과 제품 디자인이 연이어 인쇄돼 나왔다. 인쇄기 옆 모니터에는 잉크 종류와 건조기 온도 등 작업 관련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날 만난 정기설(65) 명장은 바지 곳곳에 하얀 잉크가 튄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1985년 이 회사에 입사해 올해로 42년째 이 현장을 지키고 있는 베테랑이다. 25세 청년으로 입사했던 그는 어느덧 비행기 조종사가 된 아들과 초등학생 손주를 둔 가장이자 할아버지가 됐다.

동원시스템즈 회사 개요/그래픽=김지영

정 명장의 진가는 여러 잉크를 배합해 정확한 색을 구현하는 '조색' 기술에서 드러난다. 기본 12가지에 특수 색상 2가지를 더한 14가지 잉크로 고객사가 원하는 색을 맞춰낸다. 정 명장은 "색을 보는 순간 필요한 잉크 종류와 배합 비율이 자동으로 떠오른다"고 말했다.

색 배합 데이터를 갖추는 것과 고객사가 만족하는 색을 완성하는 건 다르다. 디자이너가 미묘하게 다른 색감을 요구하면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잉크색을 조정해야 한다. 또 조색 시간을 줄이고 원료 손실을 최소화해 색을 완성하는 작업은 숙련된 정 명장만이 가진 경쟁력이다. 정 명장은 "인공지능(AI)은 이런 조정작업을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월이 축적한 노하우는 귀 끝에도 남았다. 정 명장은 기계에서 나는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후배들이 설비 이상 징후를 알아채고도 원인을 찾지 못해 애를 먹을 때 구원투수로 나서 해결한게 여러번이다. 동원시스템즈가 2022년 정년을 맞아 회사를 떠나려던 그에게 재고용(기존 연봉보다 낮게 책정)을 제안한 이유기도 하다.

지난 9일 충남 아산에 위치한 동원시스템즈 아산사업장에서 만난 정기설 명장./사진제공=동원그룹

그처럼 재고용을 하는 사례는 회사에서도 몇 안되는 케이스다. 정 명장은 이후 매년 계약을 갱신하며 근무 중이다. 정 명장은 같은 회사로 출근했던 정년퇴직 이튿날을 회상하며 "너무 익숙한 곳인데 마음가짐은 새로 출발하는 것처럼 설렜다"며 "지금의 내 역할은 후배들이 원활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명장이 재직기간 바라는건 후배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온전히 전수받는 것이다. 후배가 그의 도움 없이 일을 잘 마쳤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묻자 "이제 많이 올라왔구나,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란 답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엔 씁쓸함이 아닌 만족스러운 웃음이 비쳤다. 정 명장은 "후배들이 우수한 기술자로 성장해 인정받고 우리가 만든 포장재가 세계 시장으로 수출된다면 그것이 곧 나의 보람이자 내가 인정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 65세' 입법 하반기 재시동..."법 사각지대 위한 대책 필요"

-국회, 추석 이후 논의 재개 전망

[서울=뉴시스] 고승민 기자 =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회복과 성장을 위한 정년연장특위 민주노총 현장노동자 간담회'에서 김주영 특위 간사가 발언하고 있다. 2026.04.29. kkssmm99@newsis.com /사진=고승민

정부와 여당이 정년 65세 연장 연내 입법을 처리 중이지만 넘어야 할 고비가 많다. 특히 법정 정년만 늘려서는 법 사각에 있는 '정년 밖 시니어'들을 보호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이에 대한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더불어민주당은 추석 연휴 이후 정년연장 특별위원회 등을 통해 정년연장 논의를 재개한다는 방침이다. 입법 시계는 이미 계획보다 늦게 돌아간다. 민주당 특위는 작년 연내 입법을 공언했지만 올해 6월 이후로 일정을 수정했다.

지난 4월 노동계 및 경영계와 잇따라 간담회를 가졌지만 노사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6월에 나온 중재안도 최종 합의되지 않은 상태다. 여야 간은 물론 정치권과 노동계 간 이견이 적잖다.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는 쉽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논의가 늦어지는 과정에서 입법 사각에 대한 우려가 대두한다. 정년 밖에 있는 시니어들이 법을 통해 보호받기 어려운 구조라는 거다. 추가 논의를 통한 보완입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지난 8월 11일 중소기업 인력포럼에서 발표한 자료는 현실을 잘 반영한다. 향후 5년간 정년연장 영향권에 들어가는 55~59세 정규직이 176만7000명인데, 이 가운데 중소기업 근로자가 148만3000명으로 84%에 달했다.

그런데 이 중 정년제를 실제로 운영하는 중소기업 재직 인원은 85만5000명이었다. 나머지 62만8000명은 정년제를 운영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특히 1~4인 사업장 정년제 운영 비율은 13.2%, 5~9인은 30.5%에 불과했다.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근로자들이 정년연장의 효과에서 배제되기 쉽다는 결론이 나온다. 법정 정년을 단순히 늘리는 것 만으로는 정년연장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부와 여당도 그래서 단순 정년연장보다는 '계속 고용'으로 논의 범위를 넓힌다. 정부가 직무와 근로시간, 임금체계 개편을 병행하는 '세대상생형 정년연장'을 입법하겠다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달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중기 현장엔 정년 자체가 없을 정도로 미스매칭이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이 지난 6월 내놨던 중재안 초안에도 정년연장과 함께 재고용이 언급됐다. 법정 정년을 늘림과 동시에 정년퇴직자를 재고용하는 연령을 2028년 61세에서 시작해 2035년 65세까지 높이는 방안을 검토했다. 국민의힘이 주장하는 안은 좀 더 사용자 선택권을 강조했지만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여야 모두 재고용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년연장 논의의 폭이 더 넓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권 한 관계자는 "지금 논의의 중심은 더 오래 고용하거나 다시 채용하는 방식인데, 애초에 정년제를 운영하지 않는 기업 근로자나 정년 전에 일자리를 떠나는 중장년층에게 직접 혜택을 주는 입법은 부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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