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思見]4세 경영시대…영조와 이건희 회장의 조언

오동희 기자
2016.03.04 16:23
[편집자주] <B>재계 전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사견(私見)일 수도 있지만, 이보다는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라는 취지의 사견(思見)을 담으려고 노력했다.</B>

한국 재계의 리더십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가업승계의 성격이 강한 국내 재계의 리더십 변화는 형제간, 혹은 부자간 경영승계로 이어지는데, 최근 들어 변화의 조짐이 더욱 뚜렷해 지고 있다.

창업 120년이 된 두산 그룹은 한국 재계에선 사실상 처음으로 창업주 4세대의 경영자가 탄생했다. 박용만 회장이 장조카인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회장의 바통을 넘겼다. 흔치 않은 경영 승계다.

일각에선 이런 경영권 승계의 과정이 공개된 기업의 사유화로 보고, 좋지 않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선관주의의무'를 강조해온 박용만 회장의 성향으로 볼 때 박 회장이 박정원 회장에게 물려준 것은 '기업 두산'이 아니라 이 기업의 '선량한 관리자'의 역할을 넘긴 것으로 추정한다.

두산 그룹 외에도 창업주의 2~3세대에서 3~4세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기업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

SK 그룹은 아직 멀었지만 삼성은 와병 중인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이재용 부회장이 사실상 경영승계를 한 상태이고, LG는 구본무 회장이 동생인 구본준 (주)LG 부회장에게 많은 역할을 이양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건재하지만, 장남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정 회장 보좌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경영권 분쟁이 있기는 하지만 신동빈 회장이 신격호 총괄 회장의 지위를 현재는 물려받은 모양새다.

GS칼텍스는 허동수 회장이 물러나고 동생인 허진수 부회장이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현대상선의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고, 이재현 CJ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주)CJ와 CJ제일제당의 등기이사직을 내려놨다.

포스코, KT 등 전문경영인 그룹을 빼면 현대중공업 그룹, 한화그룹, 한진그룹, 금호아시나, 효성 등 그룹도 일부를 제외하면 창업주 3세들이 경영수업을 끝내고 경영일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때로는 격려로, 때로는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경영승계는 한국적 기업문화의 특성상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결국 한국경제를 위해 어떤 경영자가 훌륭한가를 따져보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게 맞을 듯하다.

1994년 6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선언'을 하며 임원들을 모아 놓고, 기업의 역할과 경영자의 자질에 대해 설명한 대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은 이 자리에서 "전문경영인이 이상적이다? 오너 경영인이 이상적이다? 다 엉터리다. 가장 우수한 경영자가 제일 좋은 경영자다. 오너건 전문 경영인이건 관계없다. 좋은 물건을 싸게 잘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이익을 주는 기업이 좋은 기업이다"라고 말했다.

기업의 역할 중 첫 번째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기업의 영속성을 유지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사회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경영승계를 하는 경영자의 최고 자질은 좋은 기업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여기에 덧붙여 리더는 듣기를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복잡다단해진만큼 최고경영자가 모든 것을 알고, 최선의 결정을 하기는 힘들다.

조선 초기 재상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꿈꿨던 것은 '왕의 아들이 반드시 훌륭한 자질을 갖춘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리더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뜻대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보다는 훌륭한 인재를 뽑아, 그들의 의견을 듣고 최선의 결정이 이르도록 하고, 그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가 리더의 자리다.

영화 '사도세자'에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대목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영조 25년 2월 대리청정을 시작한 사도세자가 그동안 꿈꿨던 각종 제도의 개편과 시행을 결정하고 신하들에게 하교하자 영조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결정하니 좋으냐"며 "왕은 무엇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라고 말한다.

이는 다른 의미로는 듣는 자리라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대리청정 당시 세자에게 기본적인 지침을 하달했다. "여러 신하들이 아뢰는 일을 '그렇게 하라(依爲之)'는 세 글자로 임시방편으로 대답하면 반드시 잘못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에게 물으라고 말했다.

한국 재계 리더 그룹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창업자와 2세 경영자들은 동지적 관계였다. 기업을 일구는 전투 과정에서 2세들도 그 역할을 함께 했다. 3세와 4세들은 대부분 안정된 환경에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해외파들로 글로벌 감각을 가졌지만 현장에서의 전투경험이 선대들보다는 부족하다.

결국 이들이 갖춰야 할 덕목은 인재를 보는 눈과, 거슬리는 얘기라도 들을 줄 아는 귀, 보고 들은 후에는 배운 글로벌 감각을 동원해 과감하게 결단하는 용기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