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가격 인상이 메모리를 넘어 비메모리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원재료와 에너지, 물류비 상승 압박에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잇따라 공급가격을 올리고 있다. 자동차·가전·산업 장비 등 전방 산업 전반에서 '칩플레이션(Chipflation·반도체발 물가 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이하 ST마이크로)는 최근 고객사에 다음달 26일부터 주요 제품군의 가격을 인상할 예정이라고 공지했다. 스위스에 본사를 둔 ST마이크로는 차량·센서·전력제어 등에 쓰이는 반도체를 생산하며 애플과 테슬라, 엔비디아, 스페이스X 등 다양한 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다.
ST마이크로는 공지 서한에서 "원가 상승과 함께 원자재 공급 유지를 위한 계약 조건이 강화됐다"며 "에너지와 물류비용 상승뿐 아니라 파운드리(반도체위탁생산), 외주 패키징·테스트(OSAT) 비용까지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다른 업체도 상황은 비슷하다.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 2위인 NXP도 다음 달부터 일부 제품 가격을 인상하기로 했다. 원자재와 인건비, 물류비 등 전방위적인 비용 상승이 배경이다. 인피니온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역시 오는 4월 가격 인상을 고객사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기업이 생산하는 반도체는 차량용 MCU(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 전력 반도체, 센서 등 산업 전방에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특히 인피니온과 NXP, ST마이크로, TI 등은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4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공급망 내 영향력이 큰 기업들이 동시에 가격 인상에 나선 셈이다.
여기에 AI(인공지능) 관련 반도체 수요와 생산 증가로 소재 가격이 상승 중이다. 반도체 기판 핵심 소재인 CCL(동박적층판)을 생산하는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은 다음달 1일부터 제품 가격을 최대 30% 인상할 예정이다. 지난해 두산 전자BG의 CCL 평균 판매 가격은 전년보다 17.8% 상승했다.
소재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 업체들이 추가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물량을 우선 배정받기 위해 비용을 더 내는 방식이다. 아울러 중동 지역 지정학적 불안으로 에너지와 물류비까지 상승하면서 반도체 제조 원가는 전방위 압박을 받는 모습이다.
비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은 산업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데이터센터 전력 장비를 비롯해 산업용 인버터,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대부분 전자제품에 필수적으로 들어가서다. 특히 비메모리는 맞춤형 설계 비중이 높아 단기간 내 공급처를 변경하기도 어렵다.
자동차 산업의 부담도 커질 전망이다. 시장분석업체 욜(Yole) 그룹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차량 1대에 탑재되는 반도체 비용은 약 600달러 수준이다. 전기차는 이보다 더 많은 반도체가 필요하다. 차량용 반도체 가격이 10%만 상승해도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는 수십만원의 원가 부담이 추가된다.
이미 메모리 가격 상승의 영향은 소비자 제품 시장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6개월간 범용 D램 가격이 약 5배 급등하면서 이를 탑재한 PC·노트북·스마트폰 가격이 전반적으로 상승했다. 비메모리 가격 상승은 이같은 '칩플레이션'을 더 부채질할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반도체 업체들이 비용 상승을 일정 부분 흡수해왔지만 이제는 가격에 반영하는 국면으로 전환됐다"며 "메모리에 이어 비메모리까지 가격 인상이 확산하면 산업 전반의 원가 구조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