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국산 신약 '세노바메이트'가 국내허가 이후에도 7개월 넘게 출시되지 않는다. 건강보험급여를 받은 뒤 공급하겠다는 제약사 방침 때문이다. 미국·유럽에서 수많은 환자를 구하고 있는 신약을 정작 한국 환자는 비싼 가격에 역수입한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뇌전증 국산 신약 세노바메이트는 지난해 11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국산 41호 신약으로 허가받았지만 제약사의 '급여등재 후 출시' 방침에 따라 국내 처방이 이뤄지지 않는다. 세노바메이트는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이중작용제로 발작을 조절하는 효과가 탁월해 뇌전증 치료의 '게임체인저'로 불린다. 2019년 미국에서 허가받은 후 출시된 '엑스코프리'는 분기마다 판매실적을 경신하며 SK바이오팜의 효자상품이 됐다.
하지만 정작 종주국인 한국의 환자는 수년째 치료기회조차 갖지 못한다. 지난해 식약처의 허가를 획득했지만 출시되지 않아 비급여 처방조차 불가능하다. SK바이오팜과 한국 등 30개국의 생산·판권계약을 한 동아에스티는 "정부로부터 급여를 획득한 이후 내년 출시가 목표"라고 말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국산 신약' 세노바메이트의 역수입에 나섰다. 실제 지난해 3월부터 한국희귀필수의약품센터(이하 센터)를 통한 구매대행이 본격화한 이후 1년 동안 유럽 제품 '온토즈리' 수입물량은 4배 넘게 증가했다.
센터에 따르면 세노바메이트의 유럽 제품 '온토즈리'의 국내공급 건수는 2025년 2분기 65건에서 2026년 1분기 268건으로 4.1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공급량(팩 기준)도 79팩에서 347팩으로 4.4배 늘었다. 온토즈리는 환자상태에 맞춰 용량·포장 단위별로 여러 제품이 있는데 공급되는 종류도 갈수록 다양해진다.
센터는 환자치료에 꼭 필요하지만 국내에 유통되지 않는 희귀·필수의약품을 수입·공급하는 식약처 산하기관이다. 환자가 진단서와 처방전, 구입동의서 등을 제출하고 약값·운송비를 자비로 부담하면 약을 구매대행해준다. 세노바메이트는 미국에서 2019년, 유럽에서 2021년 허가받아 각각 '엑스코프리' '온토즈리'라는 이름으로 판매된다. 수입시 비용이 9~10배 차이가 나서 온토즈리를 더 많이 찾는다고 한다.
온토즈리 수입시 알약 84개(3개월치)가 든 1팩당 가격은 55만원, 운송료를 포함한 부대비용은 50만원 정도다. 해외운송료는 N분의1로 나눠 신청자가 많을수록 낮아진다. 이를 감안한 한 달 약값은 대략 25만원으로 연간 300만원선이다. 신청 후 수입까지 6~8주가 걸린다. 센터 관계자는 "환율·유류비 등이 오르며 수입비용도 상승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과거 간질로 불린 뇌전증은 온몸이 경직된 채 거품을 물고 쓰러지거나 엉뚱한 행동을 반복하는 발작이 주요 증상이다. 뇌 신경세포의 이상흥분이 원인으로 환자가 자신의 의지로 증상을 조절할 수 없어 평소 약을 먹으며 관리해야 한다. 세노바메이트는 SK바이오팜이 개발한 뇌전증 이중작용제로 발작을 조절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한국을 비롯한 다국가 임상시험에서 유의미한 발작빈도 감소율과 완전발작 소실률을 기록하며 뇌전증 치료의 '게임체인저'란 수식어가 붙었다.
지금도 뇌전증 환자 커뮤니티에는 특히 아들딸의 치료를 위해 세노바메이트 역수입 방법과 치료후기를 묻는 보호자들의 글이 쇄도한다. 9세 환아의 보호자는 지난달 뇌전증 카페에 "더 써볼 약이 없다"며 "새로운 약을 시도하고 좌절하기를 2년째지만 그래도 또 희망을 걸어본다"고 신청 이유를 밝혔다.
신약은 식약처로부터 판매허가를 받아도 이후 급여적용까지 건강보험심사평가원(비용효과성 등 평가), 국민건강보험공단(약가협상), 보건복지부 등의 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전체 기간이 보통 1년~1년반 정도 걸린다. 세노바메이트는 급여 후 내년 초 출시를 목표로 한다. 허가 후 급여를 받지 않아도 비급여로 환자가 쓸 수 있지만 비급여·급여 등 출시방식은 제약사 권한으로 정부가 강제할 수 없다.
허가 후 출시가 지연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낮은 약가다. 한국은 급여시 기존 치료제와 가격·효과 등을 비교한 후 신약 가격을 매기는데 이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뇌전증처럼 기존 치료제가 오래 쓰이고 그래서 가격이 저렴하면 '기준'이 낮아서 효과 좋은 신약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구조다.
신약 가격이 낮으면 역으로 해외에서 한국 가격을 약가인하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어 제약사는 '이중고'를 겪을 수 있다. 신약허가를 아예 포기하거나 받아도 출시하지 않는 '코리아 패싱'이 일어나는 이유다. 화이자의 폐동맥고혈압 치료제 '레바티오'는 2007년 4월 품목허가를 받았지만 약가협상에 실패해 출시되지 않다가 6년이 지나 특허가 만료된 후 복제약(파텐션)이 나오고야 환자가 쓸 수 있었다.
세노바메이트의 국내출시 지연에도 경제성 논리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SK바이오팜으로부터 국내 생산·판권을 계약한 동아에스티는 머니투데이에 "비급여로 출시할 경우 실제 이를 사용할 수 있는 환자가 많지 않을 수 있다"며 "급여협상에서도 변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 환자의 신약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된다. 낮은 약가에 허가신청을 미루거나 건강보험 급여등재 후 제품출시를 결정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이에 정부는 올해 희귀난치성질환을 대상으로 허가·급여를 연계한 '신속등재'와 약가협상의 불이익을 줄이는 '유연계약제'를 통해 신약 접근성을 확대할 계획이다. 유연계약제는 신약이 급여가 결정돼도 표시가격(공개)과 실사용 가격(비공개)을 별도계약으로 달리 책정하는 이중가격제도다.
앞서 정부는 지난 3월에 발표한 '국민건강보험 약가제도 개선방안'에서 신약 접근성 강화조치를 발표했다. 희귀난치성질환 치료제는 신속등재를 통해 허가 후 급여기간을 100일 이내로 단축하고 사후평가 강화를 통해 건강보험 재정건전성을 유지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