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일 '마그마'가 써낸 모터스포츠의 새 역사…유럽 달궜다

유선일 기자
2026.06.25 15:23

정의선 회장 '도전 DNA' 바탕
'WEC용 엔진 전환' 결단 내린 장재훈 부회장…호세 무뇨스 사장도 적극 지원

/사진=현대차그룹

"도전해야 변할 수 있고 바뀌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지난 2015년 11월 한국 최초의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제네시스' 출범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한 말이다. 현대차그룹은 한국 완성차 업체에 사실상 '불모지'였던 글로벌 내구 레이싱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원동력을 정 회장이 강조한 '도전 DNA'에서 찾는다.

제네시스의 내구 레이싱 도전은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4년 12월 4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제네시스는 월드 인듀어런스 챔피언십(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하 WEC) 하이퍼카 클래스 참가를 공식 선언했다. 내구 레이싱 전담 부서조차 없던 제네시스는 이후 499일만인 올해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WEC 개막전 '이몰라 6시간'에 직접 개발한 'GMR-001 하이퍼카'로 데뷔해 17호(#17), 19호(#19) 차량 2대가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557일이 지난 이달 14일(현지시간)에는 GMR-001 하이퍼카 #19 차량이 세계 최고 권위의 내구 레이스 '르망 24시간(24 Heures du Mans)'에서 완주에 성공했다.

"해보자" 현대차그룹 경영진, WEC 출전 내부 제안에 화답
[서울=뉴시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루크 동커볼케 현대차그룹 CDO 겸 CCO가 13일 제조사 빌리지 내 제네시스 부스에 전시된 차량과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사진=김민성

2024년 12월 제네시스의 모터스포츠 진출 계획을 발표한 현대차그룹 CDO(글로벌 디자인 본부장) 겸 CCO(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 루크 동커볼케 사장은 "최고 경영층에게 제네시스의 내구 레이스 참가를 제안하고 얼마 안 돼 '해보자'는 답을 받았다"며 "이 속도감이 우리가 가진 '하이퍼스피드 정신'"이라고 밝혔다.

루크 동커볼케 사장의 도전적인 제안, 그리고 그 이전부터 제네시스 브랜드의 확장과 모터스포츠 진출에 대해 고심해왔던 최고 경영층의 도전 DNA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하이퍼스피드 프로젝트'가 출발할 수 있었다.

루크 동커볼케 사장은 "최고 경영층은 레이스 참가의 목표를 '기술과 내구성 등 모터스포츠의 교훈을 통해 고객에게 더 나은 차량을 만드는 것'이라고 명확히 제시했다"고 말했다. 천문학적인 예산과 인력 투입이 필요한 모터스포츠 도전이 최종적으로 고객을 위한 '더 좋은 차 만들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원팀'이 만들어 낸 900마력 엔진
(서울=뉴스1) = 제네시스 브랜드는 국내 완성차 업체 최초로 세계 최고 권위 내구 레이스 대회인 '르망 24시간' 완주에 성공했다고 15일 밝혔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GMR)의 하이퍼카 GMR-001 19호는 14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린 94회 르망24시 최상위 등급 하이퍼카 클래스에서 출전 차량 18대 가운데 13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완주에 성공했다. 사진은 르망 24시간 결승선을 통과하는 GMR-001 하이퍼카 #19 차량. (제네시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프로젝트 추진을 결정한 직후 제네시스는 조직 구축과 차량 개발을 동시에 착수했다. 먼저 제네시스는 자체 신생 팀인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을 구성했다. 일반적으로 완성차 브랜드가 모터스포츠에 진출할 때 기존 레이싱 팀을 그대로 인수하거나 외주 운영팀을 활용하는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자체 팀을 꾸린 제네시스는 엔지니어와 드라이버 역량을 키우기 위해 프랑스의 명문 레이싱 팀 'IDEC 스포트'와 손잡고 2025년 유러피언 르망 시리즈(ELMS) LMP2 클래스에 참가했다.

제네시스가 '하이퍼스피드'를 강조했지만, 모터스포츠는 단기간에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경쟁력 있는 차량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리고, 파워트레인까지 자체 개발하려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기존 강팀이 수십년 동안 쌓아 온 경험을 짧은 기간 안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평가다.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속도감 있는 개발을 위해 그룹이 기존에 보유하던 기술 자산이자 이미 수년간 검증을 마친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 엔진을 전혀 새로운 WEC용 엔진으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특히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과 현대모터스포츠법인, 남양연구소의 협업이 원활히 이루어져 '원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역할과 자원을 배분하고 공동 기술 개발을 위한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경영진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과 현대모터스포츠 법인, 남양연구소는 2024년 6월부터 WEC 엔진 공동 개발에 나섰다. 현대차의 WRC 출전 차량에 탑재하던 1.6L 터보 직렬 4기통 엔진 두 개를 결합해 WEC를 위한 'G8MR 3.2L 터보 V8'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서울=뉴스1) = 제네시스 브랜드는 국내 완성차 업체 최초로 세계 최고 권위 내구 레이스 대회인 '르망 24시간' 완주에 성공했다고 15일 밝혔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팀(GMR)의 하이퍼카 GMR-001 19호는 14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르망 라 사르트 서킷에서 열린 94회 르망24시 최상위 등급 하이퍼카 클래스에서 출전 차량 18대 가운데 13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완주에 성공했다. 사진은 GMR-001 하이퍼카 #17 차량드라이버 안드레 로테러(왼쪽부터), 피포 데라니, 마티스 조베르와 #19 차량 드라이버 다니엘 훈카데야, 폴-루 샤탕, 마튜 자미네. (제네시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G8MR 3.2L 터보 V8 엔진은 현대차그룹이 개발한 모든 파워트레인 중 가장 강력한 출력을 자랑한다. 이론상으로는 최대 900마력의 힘을 낼 수 있다. 같은 조건의 양산 엔진 대비 중량이 수십 ㎏(킬로그램) 가벼워 차량의 무게를 극한으로 낮추는 레이스 환경에 최적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릴 아비테불 총감독은 검증된 엔진을 하이퍼카 엔진 개발에 활용한 것에 대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기술과 노하우를 토대로 출발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밝혔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대표이사 사장의 지원도 힘을 보탰다. 무뇨스 사장은 모터스포츠 진출이 유럽과 북미 시장에서 제네시스의 인지도를 높이고 브랜드 가치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라고 판단했다. 그는 이번 르망 24시간 현장을 찾아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함에도 '르망 24시간'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출전을 결정했다"며 "WEC는 유럽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인기 있는 스포츠이기 때문에 브랜드 인지도 측면에서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말했다.

556일 만에 내걸린 '라 사르트의 태극기'
지난 12일(현지시간) '르망 24시간' 개막을 앞두고 열린 드라이버 퍼레이드에서 '제네시스 X 그란 컨버터블'을 운전하는 제네시스 브랜드 파트너 겸 마그마 레이싱 어드바이저 재키 익스(운전석)와 (뒷자리 왼쪽부터) 'GMR-001 하이퍼카' 드라이버 마티스 자비에, 루이스 펠리페 데라니, 안드레 로테러/사진=현대차그룹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모터스포츠 진출을 선언한 지 556일 만인 지난 6월 13일 대한민국 브랜드 최초로 르망 24시간 하이퍼카 클래스에서 레이스를 시작했다. 공식 경기 시작 전 모든 팀과 드라이버, 엔지니어 등이 차량 앞에 일렬로 정렬하고 각 제조사의 국기가 그리드 위에 펼쳐지는 '출발 세리머니'에 역사상 처음으로 태극기가 라 사르트 서킷에 등장했다. 단순한 레이스 참가가 아닌 한국 자동차 산업과 브랜드의 존재감을 세계 무대에 각인시키기 위한 도전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하루 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르망 24시간 경기 완주에 성공했다. GMR-001 하이퍼카 #19 차량은 라 사르트 서킷을 총 372바퀴, 5068㎞ 달렸다. 단 하루 만에 서울과 부산을 6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주행한 것이다.

함께 출전한 #17 차량은 레이스 종료를 7시간 반 남겨둔 시점에서 서스펜션 이상으로 리타이어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서스펜션 이상의 원인을 분석하고 있으며, 시즌 후반 레이스에서 업그레이드를 단행할 계획이다.

다만 현대차그룹은 레이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만이 목표는 아니라고 밝혔다. 정 회장도 지난 2024년 11월 WRC 일본 랠리가 열린 나고야에서 "스포츠가 항상 승패가 있는 것이니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는 것"이라며 "좋은 성적은 우리가 자동차를 열심히 연구하고 잘 만들어내는 데 힘을 주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은 내구 레이스를 통해 고객을 위한 더 나은 차량을 개발하는 데 더 집중한다는 목표다. 서킷 위에서의 '원팀'을 넘어 고객을 위한 '원팀'을 만드는 것이 바로 '하이퍼스피드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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