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전 산업의 지형을 바꾸는 'AI 전환(AX·AI Transformation)' 시대가 도래하며 제조업 현장 역시 거대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소재 한국지멘스에서 만난 디지털 인더스트리 사업부 포트폴리오 제품 총괄 장희돈 상무는 "제조업 AX는 이미 공장 안에 들어온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2004년 지멘스에 입사한 그는 "입사 후 15~16년 동안 경험한 변화보다 최근 5년간의 변화가 훨씬 더 빠르게 체감된다"면서 "이 5년 중에서도 올해와 지난해의 변화가 그 이전 3년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AI의 세대교체 주기가 이제 3개월에 한 번 수준으로 단축된 것이 가속의 배경이다. 기술의 진화 속도가 선형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다는 의미다.
장 상무는 제조업의 진화 단계를 규칙 기반의 '자동화(Automation)'에서 생산공정이 스스로 학습하고 최적화하는 '자율화(Autonomy)'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정의했다. 기존 자동화가 미리 정해진 도면과 규칙에 따라 기계가 순차적으로 작동하는 구조였다면, 자율화는 AI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실시간으로 공정을 개선해 나가는 단계다.
지멘스가 지난 4월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공개한 생성형 AI 기반 에이전트 솔루션 '아이겐 엔지니어링(Eigen Engineering)'은 이 같은 자율화를 가능하게 하는 대표적인 제품이다. 공장 제어 시스템(Edge)에 사내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탑재해 엔지니어링 과정을 대화형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한 솔루션이다.
예컨대 엔지니어가 '모터가 돌 때 알람이 나면 멈추게 해줘'와 같이 자연어로 대화하듯 명령을 내리는 것만으로도 AI가 제어 로직과 프로젝트 구조를 자동으로 생성해 준다. 과거에는 베테랑 엔지니어가 머릿속으로 공정 로직을 구상하고 복잡한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던 영역이다. 생성형 AI가 이 과정을 대신하면서 현장의 진입 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셈이다.
자율 공정이 이미 상용화 단계에 접어든 사례도 다수 있다. 올해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지멘스가 선보인 대표적 공정 중 하나가 펩시코 사례다. 글로벌 음료 기업 펩시코는 축구 경기 등 이벤트 변수에 따라 소비 패턴을 분석하고, 이를 공급망 전체와 연동해 소량 맞춤형 제품을 생산한다.
브라질과 독일의 축구 경기가 열릴 때 기후 조건과 양 팀의 상징 색상이 소비에 미치는 영향을 AI로 파악해 페트병 라벨링을 각 국가 소비자들이 더 선호하는 색상으로 커스터마이징하는 방식이다. 연관된 물류와 공급망이 AI를 통해 유기적으로 가동되기에 가능한 공정이다.
스낵 브랜드 프링글스 역시 공장 주변의 온도와 습도 등 외부 환경 조건에 따라 도우를 어느 정도 구워야 가장 적합한 식감이 나오는지를 AI 기반 시뮬레이션으로 실시간 제어한다. 과거 작업자의 직관이나 경험에 의존했던 영역을 데이터 기반으로 정밀화한 시스템을 상용화하고 있는 것이다.
한 글로벌 러닝화 기업의 개인 맞춤형 운동화 생산 및 자율 물류 공정도 하노버 박람회 지멘스 부스에서 이목을 끌었다. 과거의 소품종 대량 생산 방식에서 벗어난 이 공정은 매장에서 고객이 발을 디뎌 압력을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마다 오른발과 왼발의 모양, 압력을 받는 부위가 모두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입력된 데이터에 따라 미드솔 구조를 AI로 즉각 설계·시뮬레이션한 뒤 3D(차원) 프린터로 바로 제작한다.
이처럼 제조업 공정이 자율화돼 사람이 하던 일을 AI가 맡게 된다면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장 상무는 독일 소재 지멘스 자체 전자 제품 공장의 사례를 들며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줄인다'는 통념을 반박했다. 그는 "AI 솔루션이 도입된다고 해서 인력이 순감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 라인을 가장 잘 아는 현장 직원들이 프로세스를 모니터링하고 시뮬레이션 값을 고도화하는 고부가가치 직무로 전환 배치된다"고 설명했다.
AI가 본격적으로 결합된 제조 현장에서는 오히려 현장을 이해하고 데이터를 통제하는 사람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지멘스의 경우 "동시다발적으로 AI 관련 프로젝트가 늘어나면서 일시적으로는 오히려 사람이 더 필요해지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장 상무는 한국 제조업 전체가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통 제조업군으로 AX가 확산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반도체나 일부 대기업은 이미 AI 전환에 앞서 있지만, 국내 제조업 전체로 볼 때 AI를 수용하는 정도에 업종 및 기업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으로 '인력 및 세대 간 격차'와 '전통 산업의 보수성'을 꼽았다. 새로운 기술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에 비해, 경우에 따라서는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위 세대나 현장의 관성에 머물러 있는 일부 조직이 신규 프로젝트에서도 기존 솔루션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장 상무는 "단순한 단편적 개선을 넘어 공장 전체의 큰 그림을 보고 AX를 주도하는 기업이 미래 제조업의 주도권을 쥐게 될 것"이라며 "기존의 솔루션을 유지하려는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준비와 의사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