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의 무약촌 공백을 신속하게 메울 수 있는 해법으로 현행 약사법에 규정한 안전상비의약품(이하 상비약) 판매처 기준인 '24시간 운영 점포' 규제를 풀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규정만 손질해도 전국적으로 1만2000여개 상비약 판매 인프라를 새롭게 확보할 수 있어서다.
21일 행정안전부와 편의점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전국 편의점 점포는 지난해말 기준으로 5만4667곳이지만 상비약 판매가 가능한 24시간 운영 점포는 4만2791곳(올해 6월 기준)으로 약 78% 수준이다. 전국 편의점의 20%가 넘는 1만1876곳에선 안전상비약을 팔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행 약사법의 상비약 판매자 등록 요건 규정 때문이다. 약사법 44조 2항엔 관할 시·군·구에 상비약 판매자로 등록하기 위해선 '24시간 연중 무휴(無休) 점포를 갖춘 자'만 가능하다고 규정돼 있다. 전국에 분포된 공공약국이 통상 밤 10시~새벽 1시 사이에 문을 닫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시간대에 운영하는 점포만 제한적으로 상비약 판매를 허용한 탓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 규정 때문에 서울 등 수도권과 지방 거주자의 상비약 접근성 양극화가 더 심화했단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24시간 미운영 편의점 중 상당수가 지방에 분포돼 있다. 특히 인구가 적고 교통 접근성이 취약한 지방 도서·산간 지역은 동네 슈퍼마켓이나 약국이 주거지에서 멀어 상비약이 급하게 필요할 때 구하지 못해 불편을 겪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산간도서는 물론 최근엔 도시 외곽 지역 편의점도 최저임금, 전기료 인상 등에 따른 비용 증가로 24시간 운영을 부담스러워한다"며 "24시간 점포 판매 제한 규정이 바뀌지 않는다면 상비약을 구매할 수 있는 편의점도 점차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편의점산업협회에 따르면 전국 편의점 상비약 매출은 2023년 832억원에서 2024년 826억원으로 소폭 감소했다. 급할 때만 소량 필요한 상비약 특성상 판매처 기준을 완화해도 관련 매출은 큰 변동이 없을 것이란게 업계의 시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초 해당 규제 완화를 추진했지만, 약사회의 반대와 정국 불안 등으로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약사회는 최근까지 복약지도 불가, 오남용 우려 등을 이유로 상비약 판매 품목 확대는 물론 판매처 제한 규제 완화도 반대하고 있다.
정부는 상비약 판매처 규제는 품목 확대 논의와 별개란 입장이다. 가장 빠르게 지방 상비약 판매 인프라를 늘릴 수 있는 현실적 해법이기 때문에 제도 개선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강준혁 보건복지부 약무정책과장은 "이미 판매를 허용한 상비약의 판매처를 확대하는 제도 개선은 약물 오남용 문제와는 큰 관련성이 없다"며 "판매처 규제는 지방 취약지역의 의약품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불평등의 문제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방문한 경북 울진 사례를 소개하면서 "울진은 면적이 서울의 약 1.7배인데 10개 읍·면 중 4곳에 약국이 없고, 편의점조차 없는 지역도 있다"며 "24시간 운영 조건을 충족해야 상비약을 판매할 수 있으니 정작 접근성을 높여야 하는 지역이 배제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편의점업계도 약사법에 △1회 1일분 한정 △만 12세 미만 판매 금지 △판매자 사전 교육 및 등록제 등 오남용 방지 기준이 마련돼 있는 점을 고려해 24시간 판매처 기준 완화를 지속적으로 요청해왔다.
의사 출신인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은 상비약 판매처 운영 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 다만 여권의 지지를 받아야 신속한 법 개정이 가능할 전망이다.
'보건복지부장관은 2016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매 3년이 되는 시점마다 그 타당성을 검토해 개선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안전상비의약품(이하 상비약) 지정에 관한 고시 제3조, 재검토 기한에 적혀있는 문구다. 하지만 상비약 재평가 및 재심의를 위한 논의는 2019년에도, 2022년에도, 그리고 올해까지 단 한 차례도 열리지 못했다. 상비약 확대를 지지하는 소비자단체를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지정심의위원회부터 열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이유다.
상비약 품목은 2012년 제도 도입 이후 13년간 재평가 및 재심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상비약 지정심의위원회'가 2017년 3월부터 2018년 8월까지 6차에 걸쳐 개최됐지만 품목 점검 및 재조정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공전한 탓이다. 각 단체의 의견을 조율해 상비약 추가 지정 논의를 이어가야 할 보건복지부는 지정심의위원회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의대 정원 이슈까지 굵직한 이슈가 해결됐지만 의약품 지정 논의에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의사이자 법학박사인 권용진 서울대 공공진료센터 교수는 "복지부가 국민의 안전보다 약사와 제약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며 "가벼운 증상에 시급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의 취지를 복지부가 무력화 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야 할 국회도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에 대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나 그동안 적극적으로 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미온적인 태도가 13년 동안 지속돼왔다. 익명을 요청한 한 여당 의원실 관계자는 "약사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약사출신 의원들이 있어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전했다.
의원들의 '동료애'가 상비약 문제의 해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 20대와 21대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각 당에 약사 출신 의원들이 소속돼 있었다. 23~24명으로 구성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위원 중 4명(약 16%)이 약사 출신이다보니 상비약 문제는 논의 테이블에도 오르기 어려웠던 셈이다.
22대 국회에서 약사 출신 의원은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 1명뿐이다. 야당의 한지아 국민의힘 의원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도 그나마 약사 출신 의원이 줄어든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국민 불편이 커지고 있는데도 법적으로 '의무'가 아니라며 책임을 방기하던 복지부가 그나마 전향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이 고무적이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이 상비약 문제 해결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다.
정 장관은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상비약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어, 환경과 여건 변화를 반영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전제한 뒤 "현재 판매가 중단된 품목을 정비하고, 품목 조정 및 판매시간 완화 등 종합적인 개선 계획을 마련 중"이라며 "특히 무약촌 지역에는 24시간 편의점이 없는 만큼, 판매시간 제한 완화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의원은 "약은 상품이 아니라 국민을 지키는 최소한의 안전망"이라며 "이제는 상비약 판매 제도의 보완과 지역별 의약품 접근성에 대한 국가 책임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전기사 : [2024년 머니투데이 창간기획] 전국 16%가 무약촌 시리즈
①의사만 부족한게 아니다…전국 16%는 약 살 곳 없는 '무약촌'
②[르포]"내 나이 85세…약 사러 한 시간 버스 타고 갑니다"
③전국 최고령 동네 10곳, 한밤중 약 살데 없는 '무약촌
④[르포]1시간 만에 타이레놀 700정을 샀다...상비약 '복약지도' 무색
⑤안전상비약 확대 반대하는 약사회, 왜?
⑥'13개→11개' 거꾸로 가는 안전상비의약품, 못 늘리나 안 늘리나
⑦ '24시간 운영' 제한만 풀어도 1.2만개 편의점에 '약'들어간다
⑧[르포]"30년째 문제없는데"…한국 편의점 상비약, 일본 1%에도 못미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