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흰 우유 소비 감소와 수입산의 무관세 공세로 유업계가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공급과 가격을 옥죄는 원유 거래 규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공유와 음용유 물량을 몇 톤 조정할지를 두고 매번 다툴 것이 아니라 시장 상황에 맞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1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매년 갈등이 되풀이되는 원유 거래 구조의 뿌리에는 24년간 이어져 온 규제 틀이 자리 잡고 있다. 현행 원유 배분 구조의 핵심은 2002년 도입된 원유 쿼터제(최저 매입량 보장제)와 2013년 원유가격연동제, 2023년 용도별 차등가격제다. 각각의 제도에 따라 낙농가 소득 보호를 위해 유업계가 구매해야 하는 양이 정해지며 원유 가격은 생산비와 연동하되 용도에 따라 나눠(쿼터) 값을 달리 매기게 된다. 이 구조에서는 농가와 맺은 계약 쿼터만큼 원유를 정해진 가격에 사줘야 하므로 유업계가 흰 우유를 가공유보다 더 많이, 더 비싸게 구매해야 한다. 소비 감소가 생산 현장에 즉각 반영되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하는 배경이다.
문제는 전체 원유 쿼터 219만3000톤 중 88.5%(194만1000톤)가 음용유에 할당돼있다는 점이다. 흰 우유 소비는 약 4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았는데 여전히 전체 쿼터의 대부분이 음용유에 배정되어 있어 수요가 늘어나는 가공유(5%) 쿼터에 원유를 돌릴 길이 마땅치 않다.
또 계약 기준 쿼터는 실제 원유 생산량과도 괴리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원유 생산량은 젖소 품종 개량과 사육 규모 대형화 등의 영향으로 전년 대비 0.4% 증가한 약 195만톤을 기록했다. 매일 원유를 짜내야 하는 젖소의 신체적 특성이 더해져 소비 감소라는 시장 상황이 생산 현장의 물량 조정에 즉각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다.
유업계는 수요 감소로 남아도는 흰 우유를 분유로 가공해 보관하는 임시방편을 쓰고 있지만 이마저도 수익성이 낮다. 국산 탈지분유 제조원가는 ㎏당 1만3000~1만4000원 수준으로 수입산(4500~5000원)의 3배가 넘기 때문이다. 가격 경쟁력이 없는 국산 분유는 고스란히 재고로 쌓이거나 손실을 감수하고 소진해야 하는 구조다. '흰 우유 소비 감소→잉여 원유 증가→분유 전환→경쟁력 악화→손실 확대'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낙농진흥회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국내 분유 재고량은 1만1300톤이다. 설상가상으로 오는 7월 유럽산 멸균유 무관세 전환 등 수입산의 B2B(기업 간 거래) 시장 공세까지 더해지면서 유업계의 재고 위기는 한계에 직면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면 낙농가는 원유가 남아도는 책임이 농가가 아닌 유업계에 있다며 정면 반박한다. 한국낙농육우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유업계가 실제 사들인 흰 우유는 제도상 사들여야 하는 쿼터로 규정된 88.5%에 못 미치는 81.2%다. 유업체가 사야 하는 물량을 임의로 줄이고 수입 물량을 늘린 것이 수급 불균형의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전체 낙농가의 13.7%(834호)가 폐업할 만큼 농가 경영 상황도 악화되고 있다. 이승호 낙농육우협회 회장은 "원유 시장의 독점적 지위를 가진 유업체들이 국산 자급률 붕괴(지난해 45.8%)를 주도해 놓고 도리어 농가에 물량 감축을 압박하는 것은 시장 지배력 남용이자 도덕적 해이"라고 비판했다.
협회 측은 대안으로 △늘어난 가공용 원유에 대한 예산 및 대책 마련 △경영위기 농가를 위한 정책자금·상호금융자금 상환 기한 3년 이상 일괄 연장 및 이자 감면 △고령·소규모 농가 대상 현실적인 폐업 보상 대책 마련 △유업체의 임의적 물량 감축 행위에 대한 엄정 대응 등을 요구했다.
업계 관계자는 "소비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의무 쿼터제 등 공급 규제의 모순이 결국 유업계의 적자와 낙농가의 경영 위기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며 "규제 완화와 함께 가공용 원유에 대한 예산 지원, 국산 원유 사용 사업장에 대한 세액공제 등 정부 차원의 정책적 뒷받침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