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예술감독과 서울시향의 재계약이 보류되면서 정 감독의 향후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예정대로라면 정 감독은 12월31일까지 재계약에 서명하고 감독직을 유지하는 게 수순이다. 서울시향이 이날 이사회에 제출한 재계약 내용만 보면 정명훈을 잡기위한 필요한 조치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그만큼 정명훈 잡기가 중요했다는 얘기다.
항공료 횡령 등의 논란으로 곤혹을 치른 정 감독을 위해 서울시향은 항공료 지급 범위를 넓히고 규정에 없었던 호텔 등 체류비용도 추가로 넣었다. 정 감독의 비영리재단 '미라클오브뮤직'의 활동을 자유롭게 허가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재계약엔 정 감독이 원하는 조건이 상당수 들어있는 셈이다. 핵심은 정 감독이 더 이상 횡령 같은 부정의 단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예술직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서울시향이 무한 배려로 합법화한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간 서울시는 '항공료 횡령'은 세계적인 예술가에겐 '별 것 아니다'라는 인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명훈은 잡아야한다'는 인식으로 재계약에 '목숨 걸 듯' 달려들었다. 시향측이 내세운 재계약 조건이 다소 파격적일 수 있었던 것도 '횡령' 정도는 무마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작용했던 탓이다.
하지만 서울시향 이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횡령' 건으로만 보면 재계약의 무사 통과는 확실시 될 수도 있었지만, 이사회가 주목한 건 다른 데 있었다. 같은 날 터진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를 향한 정 감독 부인의 '성추행 조작 지시'가 경찰 조사를 통해 드러나면서 이사회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명훈이 아니면 안된다'던 박원순 서울시장도 한발짝 물러섰다. 이날 이사회에서 재계약 체결안 전반에 대한 수정 요구가 제기되고, 안건 자체가 1월 중순으로 보류된 배경에는 박 시장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정 감독은 그간 '횡령'과 '박현정 전 대표의 성추행 사건'은 별건이라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횡령'의 주체는 '정 감독'이지만, '성추행'의 주체는 '박 전 대표'여서 다르게 봐야하며, 박 전 대표가 애초부터 자신을 모든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것은 적절치 않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정 감독 부인의 '지시'가 문자로 확인되면서 정 감독 자신도 이 고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국에 처했다. 이메일도, 전화기도 없는 정 감독이 모든 상황을 보고 받는 유일한 루트가 부인 구모씨와 비서 백모씨기 때문이다. 구모씨가 지시하고, 백모씨가 성추행 당사자를 '섭외'하는 가히 충격적인 일련의 행위에서 정 감독은 여전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할 수 있을까.
설사 몰랐다 할지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는 상상 밖의 일을 정 감독 측근에서 만들었다는 팩트만으로도 정 감독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 셈이다.
서울시와 이사회가 재계약 보류 판정을 낸 데에는 단순히 '횡령' 정도 선이 아닌,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은 것에 대한 책임론이 작용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 정도 되면 이사회나 서울시가 결정하기 전에 정 감독 스스로 사퇴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이사회가 논의하고 있는 재계약 범위는 다양하다. 2016년에 예정된 공연이 9개나 잡혀있는 만큼 재계약을 추진하거나 객원 또는 상임지휘자로 남거나 예정 공연을 소화하고 그만두는 등 모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김정욱 국가교육국민감시단 사무총장은 "정명훈 감독이 깨끗하다면 종로서에 스스로 출두해 항공료 횡령사건을 해명하고 서울시경에 아내를 입국시켜 조사받도록 했어야 한다"며 "모든 의혹들이 사정당국의 수사에 의해 밝혀지기까지는 재계약은 보류돼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 감독이 자진 출두해서 해명하거나 아내를 입국시켜 조사받는 적극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일부 예술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정 감독 본인이 어떤 사건에 직접 나서는 일을 본 적이 거의 없다"며 "이번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정 감독은 그간 서울시향 예술감독직을 그만두고 지휘만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공언했다. 그럴 때마다 서울시와 서울시향은 그를 붙잡기위해 매달렸다. 매달리면서 정 감독이 원하는 콘서트홀 건립을 위해 설계공모용역 예산 7억원도 책정했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1월 중 보류된 재계약을 다시 논의하면서 감독직을 박탈당하더라도 지휘는 계속 맡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서울시나 서울시향이 아니라 정 감독과 시민의 반응이다. 예술감독직을 버리고 지휘만 한다고 해도 정 감독은 순수한 태도로 지휘에 몰입할 수 있을지, 그의 지휘를 바라보는 시민은 온전한 태도로 예술을 감상할 수 있을지, 그리고 세계적인 지휘자의 이 논란이 글로벌 뉴스를 타고 번진다면 그쪽에선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편한 의구심은 여전히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정 감독 본인의 결단과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이구동성이다. "나는 예술밖에 모른다" "그 일은 별개다" 같은 뜬구름 잡는 해명이 아니라 "횡령은 어디어디서…" "성추행 조작 지시는…" 같은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