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오후 1시30분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모 금융사 홍보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자가 취재해 쓰려는 기사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용건이었다. 그 날은 하필 신문에 기획 면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데다 오후 2시30분부터 인터뷰 약속도 잡혀 있었다. 2시엔 인터뷰 장소로 출발해야겠기에 “죄송하지만 담당 기자에게 말씀하시면 인터뷰 갔다 와서 기자에게 얘길 듣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인터뷰를 다녀와 기자가 작성해놓은 기사를 읽었다. 금융사가 소비자에게 혜택이 되는 서비스를 도입했는데 법적 규제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규제 문제를 제기해 금융사에 좋은 기사인데 그 금융사가 할 말이라는 게 뭐냐”고 물었다. “규제 때문에 일을 못한다는 식의 기사가 나가면 금융감독원한테 찍힐 수 있다고 걱정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황당했다. “금융사가 느끼는 불합리한 규제에 문제 제기하는 것도 언론의 역할인데 금감원 눈치 보느라 그런 기사도 못 쓰냐”고 재차 물었다. 기자는 “그 회사가 신상품을 내려고 금감원에 승인을 신청해 놓았는데 그런 기사가 나가면 언론플레이한다고 금감원이 싫어하고 신상품 승인도 시간을 끌면서 안 내줄 수 있다고 한다”고 했다.
돌아보니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중국 금융사의 국내 진출에는 규제가 거의 없는데 국내 금융사는 중국 가서 사업을 승인 받기가 너무 어려우니 국내 금융당국이 이런 문제를 중국 금융당국에 제기해야 한다는 기사를 내보낸 적이 있다. 기사가 나간 뒤 금감원이 기사에 사례로 나온 국내 금융사에 전화를 걸어 이런 내용을 언론에 제보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중국 진출에 어려운 점이 뭐냐, 금감원이 도와줄 일이 있느냐, 이런 걸 물어보는게 아니라 기사 출처를 조사했다는 것이다.
모 금융사 임원과 얘기하다 “금감원 규제가 국제기준보다 더 엄격해 왜 그런지 물어봤더니 그냥 따르라고 하더라”라는 말을 들었다. 기사가 된다고 생각해 자세한 내용을 묻자 더 묻지 말라며 입을 닫았다. “괜히 그런 기사 나가서 금감원이 우리가 기사를 줬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이 취임 이후 반복해 강조한 것이 불합리한 규제를 개선하고 구두지도와 행정지시를 자제해 금융사의 자율과 창의를 촉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융현장에서 느끼는 금감원은 여전히 군림하는 존재다. 금융사에 대한 검사와 제재 권한, 신상품에 대한 승인 권한을 무기로 휘두르면 금융사는 꼼짝할 수 없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자살보험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금감원은 대법원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는 판단을 내리자 소멸시효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소멸시효와 관계없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고 미지급시 제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하자 보험사 입장이 곤란해졌다. 금감원 말을 따르자니 주주들 눈치가 보이고 대법원 판결을 따르자니 금감원의 제재가 무섭다.
금감원은 신협을 시작으로 자살보험금 미지급 금융사를 제재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줄줄이 제재 방망이를 휘두를 기세다. 보험사들은 전전긍긍이다. 보험사도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아예 무시하고 넘어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주주가 대법원 판결을 문제 삼아 배임 문제를 제기했을 때 설명하고 설득할만한 논리가 필요한 만큼 방안을 찾고 싶은 것이다.
금감원이 먼저 보험사들을 불러 대법원이 소멸시효를 인정했으나 우리는 소비자 신뢰를 고려해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는게 옳다고 보는데 어떤 입장들이냐 물어보고 해법을 함께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보험사도 나름의 처지가 있는데 ‘대법원이 뭐라 판단했든 우리 말을 안 들으면 제재를 받을 줄 알라’며 대화나 협의조차 시도하지 않는 것은 시장에 여전히 군림하는 금감원으로 비칠 뿐이다.
금융시장은 금융소비자와 금융회사로 이뤄진 시장의 목소리를 균형 있게 듣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해 시장 발전에 기여하는 금감원의 모습을 기대한다.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에 대해 보험업계와 대화하는 것이 ‘갑’의 옷을 벗어던지는 금감원의 한가지 시도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