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엔 밀린 숙제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크든 작든 한국 조선업뿐 아니라 세계 조선업의 지형도를 바꿀 사건들이었다. 현대중공업의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한진중공업의 필리핀 수비크조선소 정리가 그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교역량이 줄었는데 선박 공급은 넘쳤다. 세계 조선업계의 ‘빅3’였던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마저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생산능력 감축 없이 생존은 없다는 게 컨센서스였다. 3곳 모두 산다는 건 불가능하며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는 논리가 득세했다. 수차례 공적자금을 받은 대우조선해양이 살생부 리스트의 가장 앞자리에 올랐다. 저가수주로 버티고 분식회계로 부실을 가려 나머지 빅2로부터 ‘공공의 적’이 됐다. 자구책을 마련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대우조선해양은 대마불사였다. 거제 지역경제와 한몸이었고 KDB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등 채권단도 한배를 탄 형국이었다. 잃을 게 많아서 못 버리는 카드였다. 채권단에 손을 벌렸고 구제금융으로 연명했다. 빅3가 채권단에 자구계획을 내 설비와 사람을 줄이고 자산을 팔며 시간을 벌었지만 업황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LNG(액화천연가스)선시장이 잠깐 호황이어서 묻혔지만 대우조선해양은 채권단의 골칫덩이였다.
이런 사정이었기에 산업은행과 현대중공업의 빅딜 안은 기존 판을 깨고 새 판을 짜는 의미가 있다. 채권단은 여러 선택지를 고려했다. ‘빅2’가 아닌 제3의 기업을 찾았고 거제가 거점이라는 점에서 삼성중공업을 먼저 검토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이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채권단은 대우조선해양의 관리책임에서 벗어났다. 추가적인 노출위험도 낮췄다. 자금회수를 앞당길 수 있는 길도 열었다.
과거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부정적이던 현대중공업의 변심은 뜻밖이었다. 대체 무엇을 노린 것이냐는 의문이 쏟아졌다. 같은 제안에서 삼성중공업이 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봤을 수 있다. 같은 것을 봤어도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안목과 여력 그리고 의지가 조금 더 있었을 수도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현대중공업이 대우조선해양의 선박영업을 차단할 수 있고 드릴십 6척의 인도자금 2조7000억원도 챙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연구와 설계조직을 합치고, 부품과 자재를 함께 사며, 그룹 차원의 영업과 생산능력 조절, 재무관리를 하는 방안 등에 대해 나름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노조의 반대가 있지만 그대로 뒀을 때 두 회사는 더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헐값매각 시비가 나오지만 정작 팔지 않았을 때 드는 비용을 놓치고 있다. 물론 실사나 각국 경쟁당국의 독과점 심사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도 있을 수 있다. ‘주인찾기’만으로 불황의 근원인 생산능력 과잉을 당장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첫발을 뗀 시도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한진중공업의 경우 기자재를 부산·경남 일대에서 실어날라야 했고, 인건비가 적게 드는 만큼 생산성이 낮아 악전고투한 수비크조선소와 고리를 끊었다. 영도조선소는 군함 등 특수선 건조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고, 건설부문도 턴어라운드했으므로 기사회생이 가능해졌다. 채권단은 수비크조선소에 물린 필리핀은행에 한진중공업 지분을 주면서 마지막 난관을 돌파했다. 조남호 회장과 한진중공업홀딩스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조 회장에겐 발전계열사로 먹고 살 방도를 찾아줬다. 엑시트(자금회수)하는 단계가 남았다.
요컨대 채권단이 대우조선해양과 한진중공업 구조조정을 진척시키면서 현대중공업은 메가 조선사로 거듭났고 한진중공업은 정상화 문턱까지 왔다. 미완의 과제는 달라진 판에서 한국조선해양(가칭)과 한진중공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늘리며 한국 조선업의 활로를 찾는 것이다. 시장은 아직 어둡고 갈 길은 멀다.